특별한 유전인자
겨우내 지루하던 비가 개인 오후.
나는 의자에 한껏 기댄 채 책상 위로 다리를 뻗고 그 위에 랩탑 컴퓨터를 올려놓고 글을 쓴다.
마당에선 겨우내 치우지 않았던 낙엽들을 불어내느라 정원사의 송풍기의 소리가 웅웅거리고...
아이들은 먼 발치에서 얼마전 구매한 게임기 위(wii)를 즐기느라 정신이 없다.
전자기기나 컴퓨터 게임에 있어서는, 요즘 아이들이 대개 특별히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기들이 알아서 요령을 파악하고 게임을 즐기는 단계까지 이르는 것이 빠르다.
나도 그런 분야에 있어서는 어얼리 어답터(early adopter: 초기 수용자) 레벨까지는 아니더라도 항상 평균 보단 처지지 않았었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서울 곳곳에는 기계식 오락장이 존재했었다
서울역전 육교 근처나, 종로통 신신백화점 뒷켠, 종로 피마골 등에 제법 큰 오락실들이 산재해 있었다.
방앗간에서나 볼 수 있는 피대줄에 곡선 코스를 그려놓고 그것을 따라 장난감 자동차를 운전하게 만든 것이나, 지금의 두더지잡기 같은 종류의 게임기, 토굴에서 나타나는 북한괴뢰군을 장난감 기관단총으로 쏘아대고 명중되면 뻘건 불이 켜지던 게임 등 지금으로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기계식 오락기들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그 오락실에 브라운관식 오락기들이 들어서면서 변화가 오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흑백 브라운관을 이용한 블럭격파니, 팩 맨이니, 인베이더니 하는 것들이 나오다가 1980년대 초반 컬러판 '갤러그' 가 나오면서 이름 자체도 오락실에서 전자오락실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 뒤의 맥을 잇는 '제비우스' 나 '테트리스' 등이 등장항 무렵에는 여성 매니아들도 꽤 생기고, 데이트 시간 대부분을 전자오락실에서 보내는 커플도 생겨났다.
또 한가지 큰 변화는 게임기들이 전자오락실을 떠나 세상 밖으로까지 진출, 동네 골목골목 문방구니 구멍가게 옆까지 진출하며 온 동네 꼬맹이들의 코 묻은 동전들을 거둬가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거의 모든 입시학원들이 종로2가에 몰려있던 1970년대와 일부 유명학원들이 서울역 주변으로 자리를 옮겨가던 1980년대 초반까지 나는 학교와 전자오락실과 학원을 삼각형 구도로 하여 맴돌았다.
신발바닥이 헤지는 것 만큼이나 검정색 교복 궁둥이도 반질거렸고, 보이스카웃의 준비! 정신에 투철한 나의 바지주머니엔 항상 동전들이 짤랑거리곤 했다.
분식집 라면 한그릇이 200원이면 전자오락게임기는 50원 하던 시절이었다.
오락실과 전자오락실, 그리고 구멍가게 옆에 놓인 내 궁둥이 반쪽만한 의자 위에 앉아서 투자한 나의 시간과 동전의 양이 얼마나 될지는 알고 싶지도 않고, 알 수도 없으나, 한가지 분명 확실한 것은 그것이 나의 현재를 바꿀 수 있을 만큼 상당했다는 것은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하며 넘어갈 필요는 있을 것 같다. --;;
이것이 제 정신이었으면, 아니 합리적인 이성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불가능 했을 이야기지만, 여기에는 알게 모르게 나의 본능 저 밑에서 작동하는 게임 유전인자의 핑계를 달면 나의 변명에도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자, 그러면 이제 나의 두뇌 속에 굳게 자리한 게임유전인자의 모습을 들여다 볼까?
이야기는 내가 대망의 이천년대 초반 그동안 한참 사용했던 애플의 랩탑 매킨토시 파워북 컴퓨터를 어머니께 드리면서 부터 시작된다.
"야, 내가 이것이 뭐에 필요하냐?"
아, 이거 아무것도 몰라도 되고, 여기 있는 화살표만 사용해서 게임하는데 쓰시라고...
"게임? 난 별로 원하지 않는데...?"
이거 게임하면 치매도 예방되고, 소일거리도 되고, 에 또 거시기니 설라무네...
기실 난 이미 속도전쟁에서 하향길을 걷고 있던, 오래된 그 컴퓨터를 갈아치고 싶던 마음에 그것을 처분할 곳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해서, 가르쳐드린 것이 '컬럼스(Columns)' 라는 게임으로 몇 가지 다른 색깔의 벽돌로 이루어진 기둥들이 내려오면 그것을 조종해서 좌우 또는 상하로 같은 색깔이 맞춰지면 벽돌이 터져 없어지는 게임이었다.
처음엔 조금씩 맛뵈기로만 하시던 어머니는 드디어 일단계를 통과하면서 게임의 묘미에 빠져들기 시작들기 시작하셨다.
뾱.뾱.뾱.뾱...
아침에... 점심에... 저녁에... 한밤중에...
뾱.뾱.뾱.뾱...
특별한 일이 있으신 경우를 제외하고는 컴퓨터를 켜고 앉아 계시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고, 컬럼스게임의 소리가 집안에 일정한 모습으로 가득찼다.
그리고 차츰 어머니에게 게임의 중독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언제나 충혈된 눈, 부스스한 머리, 간혹 탄 맛과 함께 밥상에 올라오는 밥, 밤샘의 연속...
이러다가 우리집 안 가득히 컬럼들이 가득 채워지는 날이 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당시 우리 동네 골목길 초입엔 안성식품이란 구멍가게가 있었다.
길 건너 성대시장에 다녀오시던 어머니, 안성식품을 지나면서 문득 걸음을 멈추셨다.
붉은 벽돌담장.
담장에 붉은 벽돌들이 규칙적으로 얼기설기 쌓아올려진 모습을 한참 바라보시던 어머니의 입가엔 빙그레한 미소가 그려졌다.
'바보들. 저기 저걸 이렇게 움직이면 다 터뜨릴 수 있는데...'
컬럼스증후군! --;;
어느 아침.
격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아버지께서 역정을 내시고 계셨다.
무슨 일이세요?
"넌 저 컴퓨터나 갖다 버려라! 게임인지 뭔지는 왜 가르켜줘서... 쯧."
원래 혈압이 좀 높으시던 어머니가 게임을 하시는 통에 잠이 부족하고 피로가 쌓여 혈압이 안떨어지는 모습에 아버지께서 화를 내시는 거였다.
아버지 곁으로 죄 지은 사람 마냥 고개를 수그리신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러다 정말 큰일나겠다 싶어 컴퓨터를 집어들고 이층으로 올라가려는 나의 등 뒤로 어머니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버리긴... 아까운 컴퓨터를 버리긴 왜 버려요."
하여간 어머니는 그 이후로 그 게임을 더 이상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또 몇년이 지난 어느날.
안성식품 뒤의 예의 그 붉은 벽돌담장 아래로 인형뽑기기계가 등장했다.
동네 많은 꼬맹이들 사이로 풍족하신 몸매의 할머니가 한 분 자리하셨으니, 바로 우리 어머니셨다.
어머니께서 워낙 손재주가 좋으신 건 내 익히 알지만 이건 어머니께 어려울 것 같았다.
인형뽑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해본 사람들은 다 아는 일이다.
하지만 불패의 상무정신으로 무장하신 어머니, 열심히 오르고 또 오르고 동전을 넣고 또 넣으신 끝에 드디어 거의 게임이라면 천재에 가까운 동네 꼬맹이들의 추종을 불허하는 빼어난 실력을 갖추게 되셨다.
무길도한량이 물 건너 온 다음해, 어머니로부터 날아온 소포엔 우리 아이들에게 주는 인형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한국에 있는 다른 손녀들도 주고 동네 아이들도 주고 남은걸 깨끗한 것으로 골라 챙겨 보내주신 거였다.
대단한 집중력이시지?
집사람의 입이 딱 벌어졌다.
어머니, 요새도 인형 많이 뽑으세요?
"인형은 왜?"
그거 담배뽑는 기계도 있던데, 아들을 위해서 좀... ^^
"에라, 안뽑는다. 이눔아!"
좀 더 생산적인 뽑긴데 역정은 또 왜 내실까? ^^
여러분도 혹 길을 가다가 인형뽑기 앞에서 열심히 작업 중인 할머니 한 분을 보거든 혹 무길도한량을 아시는지 물어보기 바란다.
윗이빨 하나 빠진 입으로 벙긋 웃으시며 막 뽑아낸 인형 하나 선물로 받을지 모르니까... ^^
우월한 게임인자를 가진 그 할머니께선 요즘은 조금 고전적인 단어찾기게임을 즐기신다.
아들은 아마존닷컴에서 열심히 중고책을 사 보내드리고, 이순이 다 되신 어머니는 '치매예방'을 외치시며 가로 세로 마구 섞여있는 영어단어들을 찾느라 정신이 없으시다.
가끔 좀 더 무료해지면 컴퓨터를 켜고 카드게임 솔리테어(Solitaire)도 하시기는 하지만 역시 단어공부가 더 재미있다고 하신다.
어머니, 그거 열심히 하면 뭐 나와요?
"재밌잖니... 넌 게임 안하냐?"
아, 저도 요즘 애들과 같이 운동하는 게임해요.
"그래, 거기 날씨 탓에 바깥 운동 못할테니 뭐라도 해서 자꾸 움직여야지."
그렇지.
게임 덕분에 어머닌 치매예방 하고 나는 운동도 하고... 좋구만 뭐.
아무래도 게임에 소모한 시간과 정력을 후회할 필요까진 없을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든다.
오히려 난 물려주신 이 특별한 유전인자에 감사하는 게 옳을 것 같다.
우리 아이들대에서 더 발전된 모습으로 발현된다면 더 바랄 것도 없을 테고...
게임하자!
아이들이 좋아라 하며 당장 '무슨 게임할까?' 하며 달려든다. ^^
어머니, 건강하세요.
스카이프 너머로 윗이빨 하나 빠진 어머니가 헤- 웃으신다.
(2012.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