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오십부터래...

인생은 오십부터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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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8일 화요일

미워할 수 없는 자


미워할 수 없는 자







오늘 천기는 더 말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요.
맑은 하늘, 밝은 빛, 쾌적한 습도, 상쾌한 산들바람...
내 마음은 뭉개구름 둥실 뜬 파란 하늘 같고요.
뭉개뭉개... 둥실둥실...
이제 무길도의 청풍명월의 시절이 돌아온 모양입니다요.
기분은 그리하여 봄바람 마냥 가벼운데 멀리서 집사람까지 와주었으니 무엇을 더 바랄 수 있겠습니까요. 





우웅......
그녀의 가벼운 손놀림 끝으로 바리깡은 나의 덥수룩한 머리 위를 질주하며 사방으로 고속도로를 뚫어댔지요.
따지고 보니 우리가 처음 만난지 이제 어언 18년의 세월이 흘렀네,
어쩌고 저쩌고...
자꾸 움직이지마!
이렇게 한달에 한번씩 미장원 비용 절약한 것도 따지면 천 불도 넘을거야, 아마?
어쩌고 저쩌고...
움직이지 말라니깐!
반복되는 호령에 샐죽하여 그만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지요.
능숙하게 바리깡 날의 깊이를 끼리릭! 조절하고 그녀는 다시 손을 놀리기 시작했습니다요.
우웅......






우웅...
지금쯤 하늘은 어찌 변했을까 생각하다 이발 후 산보나 제의해볼까 하여 그녀를 불렀지요.
근데 말야...
정적을 깨고 나온 나의 목소리가 목욕탕을 울릴 만큼 컸던지, 깜짝 놀란 그녀의 바리깡이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것을 나는 느꼈습죠. 
엄마, 난 몰라!
두둥! 바리깡은 당연 스톱 되었지요.
......

벌떡 일어나 벽에 걸린 거울을 들여다보니 별 흔적도 없는데 그녀의 얼굴은 거의 울상이었습니다요.
거울론 안보일거야.
많이 표시나냐?
거울을 통해 뒷통수를 보려는 듯 두 눈동자를 양끝으로 최대한 굴려가며 내가 물었지요.
응...
흉해?
응...
에이, 쯧.






걷는 동안 그녀가 내 뒷통수를 바라보며 자꾸만 실실 웃더만요.
미안해서 어떻하지?
미안한 사람이 왜 자꾸 실실거리고 웃어?
미안하니까...
그녀가 괜히 더 친한 척 자꾸 나의 팔뚝에 매달렸습니다요.
모자라도 쓰고 나올걸... 쯧.
아냐, 그래도 앞에서 보면 잘 생겼어...ㅎㅎㅎ
거 왜 말 한마디에 깜짝 놀래고 그래?
ㅎㅎㅎ 괜찮아, 조금 지나면 괜찮을거야...ㅎㅎㅎ
뒷통수에 눈이 없으니 도대체 얼만큼 빵꾸가 났는지 난 알 수 없었지요.
하지만 그녀가 자꾸만 실실 웃는 걸 보니 제법 큰 빵꾸임에 틀림없다는 느낌은 강하게 들었습니다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전속이 실수했는데...
한 달은 눈 감고 살아가는 수 밖에요... 쯧.
쯧이구 말구요.






저 바다 건너 올림피아산 위로 하늘빛이 끝없는 설레임에서 우울한 코발트로 변하여 갔읍지요.
곧 또 한바탕 차디찬 비를 쏟으려는 기세겠지요.
그래서 발걸음을 재촉하여 총총 산보를 마감했습니다요.
우리는 아이들과 저녁을 먹으며 모처럼 한 상에 둘러앉아 가족 분위기를 냈습죠.
물을 가지러 냉장고로 가던 큰 아이가 주책없이 물었어요.
어? 근데 아빠 뒷머리 왜 그래?
......

엄마가 배고파서 좀 뜯어먹었어.
엄마가...?
그녀는 구석진 천장 끝을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에 빠진 척 했구요.







그녀는 근무 후 한달에 한 번 집에 와서도 바쁜 스케쥴을 소화하느라 정신이 없긴 하죠.
아이들의 요구사항들을 해결해주랴, 한달 동안 무길도한량이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한 집안일을 챙기랴, 교회 친구들을 만나랴, 그리고 또 학위를 위해 공부하랴...
바리깡으로 나의 머리 밀어주랴...

이런 그녀의 바쁜 일상은 간혹 한밤중의 비명으로 연결이 되곤 했습지요.
나쁜 꿈을 꾸곤 벌떡 일어나 옆에서 고이 자고 있는 사람을 마구 혼내거나, 또는 실제로 다리에 쥐가 나 경련이 오는 다리를 붙들고 밤새 괴로워 하는 일들이 종종 있곤 했었구요.







요전엔 이런 일도 있었구만요.
그녀가, 고이 옆에서 잘 자고 있는 무길도한량의 옆구리를 발길로 냅다 질러버린 것이지요.
억!
자던 중에 옆구리에 발길질을 당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입에서 나오는 소린 저 소리 밖에 없더군요.
이... 웬 아닌 밤중에 옆발질인가!
정신이 번쩍 든 무길도한량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질렀습니다요.
왜 그래?
그녀는 게슴츠레한 눈을 뜨며, 한밤에 별안간 잠을 깨운 무길도한량을 원망스런 눈초리로 쳐다보며 부시시시 일어나 앉았더만요.
일어나 앉긴 했지만 그녀의 두 눈에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것을 알아챈 무길도한량, 그저 한숨을 푸욱 내쉬며 그녀를 다시 눕혀 자도록 해줬습니다요.
끙... 내가 참아야지...
다시 누운 그녀가 이불 속으로 고소해하며 웃지 않았을까 모르겠습니다요.






여하간 그래도 우리는 잘 살고 있습지요.
바리깡에 머리도 한 줌 뜯겨도, 한밤중에 옆구리에 옆차기 한 번 받아도...
그녀의 죽어라 일하고 죽어라 하는 가족사랑 속에 잘 살고 있지요.
언젠가 결혼기념일날 호숫가에 둘이 앉아 츄러스 한 줄로 기념식사를 대신했던 것이 생각나, 이번엔 큰 맘 먹고 좋은 포도주 한 병 땄습죠.
헤... 두어 모금 마시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기냥 잠들어버리더군요.
조금만 더 참자. 나중에 지금 고생하는 거 다 갚아주겠다고 이야기 하려 했었는데, 듣지도 않고 말이죠.

그래도 참 미워할 수는 없겠지요?





(2012.05.08)

2012년 4월 16일 월요일

Flight No. 292


Flight No. 292































Flight No. 292
동체 길이 47.3m, 높이 13.6m 의 날렵한 모습의 너는 보잉 757-200 기종이다.
San Francisco 에서 이륙, 총 2,600 mile (4,183 km) 을 평균고도 35,000 ft, 평균속도460 kts (850 km/h) 로 약 5시간 동안 날아 목적지 Orlando에 도착할 것이다.
과연... 여름 성수기란 말이 무색하지 않게 좌석들은 빈 곳 하나 없이 채워졌다.
꽁치보일드 마냥 가득 채워진 사람들의 낼숨에서 뿜어져 나온 이산화탄소로 인해 기내의 산소가 고갈되어갈 무렵, 넌 선심쓰듯 에어콘을 틀어주었다.
그나마 이코노미석 보다 몇 인치 여유있는 Economy-S석을 배정받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
이런 말 한 마디도 없이 기장은 다짜고짜 기내 방송을 시작한다.
스피커가 문제 없이 잘 나오는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만 물어보지 않기로 한다.
"승객 여러분. 저는 여러분을 올랜도까지 모시게 될 기장 아무개 올시다...."
사람들은 그의 인삿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각자의 정수리를 겨냥하고 있는 에어콘 노즐을 조정하기 바쁘다.
그와 마찬가지로 승무원들도 승객들의 무관심 속에 구명동의 착용법과 비상탈출 요령을 시연해보인다.
서로에게 무관심한 것이 현대인의 생존방법 이란 사실을 일깨워 주듯이...



아, 난 참 플로리다 올랜도로 향하고 있다.

아이들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무섭게 팔자 좋은 여행이다.
플로리다에 올랜도... 좋지?
디즈니 월드가 있는 곳, 입 큰 악어도 있고, 차창을 뿌옇게 채색 해주는 러브버그 (love bugs)도 있고, 빠르기가 번개 같은 새끼손가락 만한 도마뱀들이 개미 만큼이나 우글대는 곳, 제대로 된 나무가 없고 검불들만 우거진 곳...
매일 매일 한낮의 수은주가 섭씨 35도를 넘어서는 고온다습의 날씨가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곳.
노래가 절로 나오나? 마나?


정글 숲을 지나서 가자 엉금엉금 기어서 가자
늪지대를 지나가면은 악어떼가 나온다 악어떼!
그리고 그 언저리에서 우리 집사람이 고군분투하며 앵벌이하고 있는 곳. ^^
집사람이 2년 동안 한 20번이 넘게 무길도를 와줬으니, 나도 한 번 쯤은 답방을 주어야... ^^



























하여, 나는 아이들과 함께 너를 타고 하늘을 난다.
바다처럼 푸른 하늘을 가로지르는 너의 흰 날개깃이 아름답다.
너의 날개 밑으로 산맥들과 협곡들이 구름 사이 사이로 언뜻 언뜻 나타나고, 이름 모를 플래토(plateau)와 평원들이 이어진다.
그리고 간혹 실가닥처럼 얇은 도로 곁으로 손톱처럼 작은 크기로 마을의 모습들도 보이고...
인간의 소치가 이리도 보잘 것 없는 것이리라.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바벨탑을 쌓는 인간들을 내려다보시던 그 시선을 상상해본다.

저 멀리 뭉개뭉개 일어나는 것들은 끝 없는 평원을 수놓는 양떼들의 대이동, 희망봉을 끼고 도는 바돌로뮤의 하얀 돛, 깨어져 나온 남극의 빙산 조각...
상상의 깊은 골에서 너는 약간의 터뷸런스(turbulence)에 몸을 움찔한다.
하지만 강력한 쌍발엔진과 날렵하게 광채나는 기체와 잘 훈련된 조종사의 기술로 무장한 너는 별 문제 없이 계속 나아간다.
이렇게 철저하게 내가 아닌 다른 무엇에게 나를 내맡긴다는 것을 어디 상상이나 할 수 있으랴.
우린 그저 커다란 엔진을 단 채 하늘 높이 던져진 깡통 안을 가득 채운 고기덩어리들에 불과할 뿐이다.



























인생도 이와 같은 것인가?
외줄타기 처럼 위태위태한 오늘을 살아가기에 우린 심지어 지푸라기라도 한가닥 잡으려 하며 살아가지 않는가?
이렇게 불가항력의 상황에서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빽이 필요한 시점이다.
눈을 지긋이 감아본다.
해답은 바로 그 순간 머리를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When the worries of life lead us to despair, we are not trusting you.
When we seek answers everywhere but from you, we are not trusting you.
When your word to us is clear, but fail to act, we are not trusting you.
Forgive us.

Help us always to turn to you in faith, knowing that you know what is best for us.


아내도 비행기 창밖을 내다보며 수 많은 기도를 올렸으리라.
타박타박 한걸음씩 메마른 사막을 걸어가는 우리의 삶을 위하여...
그리고 한잎 두잎 이제 막 피어오르는 어린 나무들처럼 일어서는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하여...
그리고 또 멀리서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성원과 애정을 담아 우릴 감싸주는 가족들의 안위를 위하여...
절대자의 도움을 간절히 요청하는 뜨거운 기도를 말이다.




























이제 너는 황금빛으로 불을 밝힌 올랜도의 밤 자락 끝에 우릴 안착시킨다.
우리 집사람은 한 달에 한 번 집에 올 적마다 비행기값을 절약하기 위해 600불짜리 직항을 안타고 절반 가격도 안되는 원스탑 노선을 이용한다.
우리도 오늘 원스탑노선으로 엄마 따라하기를 해보았다.
아침 6시 무길도를 떠나 10시 비행기를 타고, 샌스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연결편까지 5시간을 기다리고, 또 5시간을 비행하여 이제 올랜도에 밤 12시가 넘은 시각에 도착을 하고 있다.
물론 시차가 끼어있기는 하지만 꼬박 하루가 걸린 여정이었다.
우리를 한 번 보기 위해 매달 그녀가 걸어왔을 그 힘든 발길을 생각하며 목이 깔깔해짐을 느낀다.
이제 저 문을 나서면, 그녀는 또 밤 근무를 마치고 피곤한 표정에도 기쁜 얼굴을 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두 팔을 크게 펼치며 달려와 우리들과 포옹을 나눌 것이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오늘을 기억할 것을 바라 마지 않는다.
가는 길이 아무리 험하고 힘들어도 그들의 미래를 위해 아낌 없는 수고와 사랑을 바치는 그녀를 만나러 온 이 날을 말이다.
물론 그녀의 곁엔 항상 하나님의 든든한 빽이 함께 있었다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다.
수고하고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며 항상 두 팔을 벌리시는 하나님의.

























(2011.07.03)

2012년 3월 31일 토요일

봄날의 비사(悲事)

 
봄날의 비사(悲事)








밤새 봄비가 창을 두드렸다.
그를 반겨 창문을 열어보니, 웬걸...
나뭇가지 가득한 벚꽃이 교태 어린 탄성을 내고 있다.
생각해보니 어제 화사하던 벚꽃은 날 향한 게 아니었네...
가녀린 봄비에 한없이 미소 주는 그 꽃이 미웠다.





그래도 난 차라리 화려한 봄빛에 죽으련다.
옹달샘 가장자리 처연히 돋아난 노란꽃 수선화나
바위 틈새백이로 한무리 피어난 진달래도 좋지만
난 파란 하늘가 눈부시게 피어난 벚꽃이 좋아라.
화냥기 가득하도록 화사한 그 꽃이 좋아라.
그래서 난 차라리 화려한 그 빛에 죽으련다.





그 꽃엔 마성이 있음이 틀림없다.
분홍빛 향기 하늘 끝까지 올려 봄비를 불러낸 걸 보면...
그래도 오늘밤은 달빛이 없으니 천만다행이다.
달빛 어린 벚꽃 아래 정신줄 놓은 이 어디 한둘이었을까.
그래도 오늘은 봄바람이 없으니 천만다행이다.
쏟아지는 꽃비에 정신줄 놓은 이 어디 한둘이었을까.





그리하여 꽃그늘에 앉아 술잔을 주고 받던 날.
작은 원을 그리며 술잔에 떨어진 꽃잎을 보며 우리는 울리라.
청춘처럼 흘러갈 벚꽃의 흐드러짐을 슬퍼하며...
그리곤 마침내 예언처럼 배반의 날은 오고 만다.
사랑했던 비와 바람은 꽃잎을 몰아 눈처럼 휘날리고...
낙화로다! 낙화로다!





새벽녘 젖은 포도엔 철 지난 눈꽃들이 만발한다.
내 눈 속에 밝던 그대의 모습은 아직도 아련하건만,
무표정한 아침 하늘은 또 그렇게 파랗게 밝아왔다.
그리고 어느날 또 한번의 부질없는 맹세는 이루어진다.
내 다시는 그대를 사랑하지 않으리 하고...




(2012.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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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29일 수요일

곶감을 먹으며 감나무를 떠올리다

곶감을 먹으며 감나무를 떠올리다







때 아닌 가을이야기 한 꼭지.

해 마다 가을이 깊을 때면 우리집 마당 드높은 감나무엔 빠알간 홍시들이 주렁주렁 주렁주렁 열리곤 했다.
긴 장대로 곧추 세워 홍시를 따기 시작하면, 아버지께선 창문 너머로로 내다보시며 말씀하셨다.
"얘, 꼭대기 것들은 까치밥이니 남겨 두거라."
우리집 장대가 턱 없이 짧아, 감나무의 절반 밖에 미치지 않음에도 항상 확인을 하시곤 했다.
어머니께선 소쿠리 쟁반에 내가 따다 실수로 떨어뜨린 홍시들을 주우시고...
"얘, 좀 살살 혀라. 떨구는 게 반이다."
주홍색 홍시는 늦가을 오후의 햇살들 사이로 말갛게 빛을 냈다.





잘 익은 홍시들은 그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시도 때도 없이 떨어지곤 했다.
밤 사이에도 떨어지긴 마찬가지였는데, 가만히 듣고 있노라 치면 그 소리가 달랐다.
툭!
이건 마당 잔디밭에 떨어지는 소리로 대개 떨어진 홍시들은 절반으로 쩍 갈라졌다.
푸석!
이건 감나무 밑에 자리한 메마른 소철나무 위로 떨어지는 소리. 간혹 성한 눔들이 발견된다.
퍽!
이건 마당가로 세워놓은 정원석들 위로 떨어지는 소리. 건질 것은 하나 없이 처참한 모습.
아이고!
이건 달밤에 감 주으러 나오신 할머니 머리에 감 떨어진 소리. 완전 뭉그러진다. ^^





덕분에 아침 햇살이 내려쬘 무렵이면 마당가에 내놓은 다딤이돌 위엔 그나마 쓸만한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홍시들이 열을 지어 놓여있곤 했다.
그 중 가장 괜찮은 것 두엇은 아버지 퇴근하시면 피로회복제로...
두엇은 가끔 마실오시는 어머니 친구분들의 스낵으로...
또 두엇은 홍시라면 입이 홍시만하게 벌어지던 우리 집사람을 위하여...
또 두엇은 가을마당을 거닐다 마당가에 쪼그려 앉는 사람들을 위하여...
'어? 감 따놓은게 있네? 맛나겠는데... 한번 먹어볼까?'
온전한 감은 먹어도 될까 눈치를 보지만, 이미 깨진 감이야... ^^
그리고 때론 반건시도 만들고, 실에 꿰어 처마 끝에 매달아 놓기도 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감나무였지만 기실 감나무를 심으신 아버지의 목적은 그 열매를 먹고자 함이 아니라, 그 나무의 자라남을 보시기 위함이라 하셨다.
말하자면 관상용이었던 셈이다.
서울 시내 주택가 마당 한가운데 3층집 높이의 감나무가 관상용이라?
그래서 어느날 무길도한량은 그것에 관해 여쭈었다.
우리 감나무가 관상용이란 무슨 뜻이온지요?
"과실나무의 열매를 먹기 위함이 아니니 말하자면 '관상용'이란 것이지, 엄밀히 말하자면 그 의미는 좀 다르단다. 눈을 즐겁게 하려면 소나무처럼 더 멋진 나무들을 심었지 않겠니?"
그렇다면 우리 감나무엔 어떤 의미가 있다는 말씀이시네요?
"그렇지, 내가 우리 마당 한가운데 감나무를 심은 뜻은..."





예로 부터 감나무는 문무충절효(文武忠節孝)의 나무라고 불리는데,
첫째, 잎이 넓어서 글씨 연습을 할 수 있으니 문(文)이 있고,
둘째, 나무가지가 단단하여 화살대를 만들 수 있으니 무(武)가 있으며,
셋째, 열매의 겉과 속이 똑같이 붉어서 표리부동하지 않으니 충(忠)이 있고,
넷째, 서리가 내리는 늦가을이 되도록 열매가 가지에 달려 있으므로 절(節)이 있으며,
다섯째, 노인이 치아를 다 잃어도 먹을 수 있으니 효(孝)가 있는 나무라는 것이다.
갑자기 우리집 감나무에서 광채가 번쩍이기 시작했다...^^
아버지께서 감나무를 심은 뜻을 알고 나니 우리집 감이 더더욱 맛이 있었다... ^^
말하자면, 감나무는 한 집안을 바로 이끌기 위한 아버지의 모토를 대변하는 셈이었다.





지난 연말, 장모님께서 보내주신 곶감과 동생네 시아버님께서 보내주신 곶감을 냉동실에 잘 보관하고 있다가, 열대지방에서 오랜만에 올라온 집사람에게 꺼내놓았다.
비닐포장을 하고 페이퍼타올로 두어겹 잘 싸둔 덕분에 벌써 두어달이 지났음에도 곶감들은 가장자리에 엷은 성에들만 끼였을 뿐, 가운데 부분은 말캉말캉하였다.
한겨울 수정과에 띄운 곶감 정도의 온도나 될까?
여하간 한 10분 상온에 놔뒀다가 먹으니 그 맛이 여전했다. (장모님, 사장어른 감사합니다.^^)
워낙에 감을 좋아하는 집사람은 곶감 꺼내먹는 재미로 매일 밤이 즐겁고... ^^
그래서 옛말에 '곶감 빼먹는 재미' 라는 표현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하간 우린 잘 먹었... 먹고 있다. (다음번을 위해 아끼느라 냉동실에 아직도 좀 남겨놓았다)





보다 편리한 생활을 위하여 아파트로 이사한 이후 우린 우리집 감나무의 소식을 모른다.
단지 그 근처가 대부분 연립주택들로 메꿔졌다는 이야기로 미루어보아 정이품송 마냥 잘 생긴 그 감나무도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는 추측만 할 뿐이다.
하지만 그 감나무가 사라졌다 하더라도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려 했던 그 이상(理想)들은 홍시로, 반건시로 우리들에게 전달이 되고, 작은 감 씨앗 속에 들어있는 하얀 숟가락처럼 우리 마음 속에 굳게 자리하고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곶감을 먹다가 그 수려한 모습의 감나무가 생각이 났다.
그 감나무를 올려다보시던 아버지의 눈빛이 생각이 났다.
 




(2012.02.29)

2012년 2월 3일 금요일

겨울이야기

겨울이야기






서울의 수은주가 몇십년만의 강추위를 기록할 즈음 이곳엔 폭설이 쏟아졌다.
며칠 동안이나 눈꽃들이 하늘에서 맴돌며 맴돌며 쏟아져 내렸다.
환경오염을 막기 위해 염화칼슘 같은 제설제 사용을 금지한 이후 첫 큰 눈이라 어쩔까 싶었는데, 역시나 광주리로 쏟아붓는 눈을 감당하지 못하고 제설차량들도 그만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차도와 보도의 구분도 사라질 만큼 눈이 쌓이자 체인 친 suv들만 제 세상을 만난 듯...
아니네...
휴교령이 떨어져 일주일을 놀게 된 아이들과 덩달아 뛰어대는 강아지들이 더 즐거워 보인다.
경사 난 우리 첫째는 근처 골프장 언덕으로 아이들과 눈썰매 타러 가고...




우리도 어렸을 땐 눈만 오면 신이 났고 겨울이 즐거웠다.
지금이야 전국에 스키다 눈썰매다 해서 겨울을 즐길 곳이 많지만 딱히 갈 곳이 없고 교통도 불편했던 예전엔 나무판 밑에 굵은 철사를 붙여 만든 썰매나, 끽 해야 아이스 스케이트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마땅치 않으면 질질 흐르는 시퍼런 코를 소매 끝으로 바짝 닦아가면서 온동네 쏘다니며 딱지치기, 구슬치기, 연날리기, 팽이돌리기 같은 것들이 우리들의 재미였다.
아, 코 밑을 꺼멓게 그을리는 불깡통 돌리기도 빼놓을 수 없겠다.




그 중 나는 팽이돌리기를 무척 좋아했다.
나무팽이들은 나무를 깎아 만든 몸통을 잘 골라 구입하여 위 아래로 총알심을 박아 만들었다.
그리고 돌려보아 팽이가 떨지 않고 잘 도는지를 살피는 중심교정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 후에야 울긋불긋한 크레용으로 색깔을 칠하여 자기만의 팽이로 탄생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찍기' 종목으로 들어가면,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팽이가 뽀개지는 일도 있었기에, 다치지 않도록 평상시에 왁스를 칠하기도 하여 매끄럽게 표면을 유지해주는 등 정성을 쏟기 때문에 더 애착이 갔었는지도 모르겠다.
반면에 톱밥팽이는 모든 것이 완성된 상태로의 일체품으로 나왔기 때문에 별 애착이 갈 수가 없었다.
나무팽이들이 좀더 편리하지만 못생긴 톱밥팽이들에게 차츰 자리를 내주면서 개성은 사라지고 재미는 줄어들고 말았다.
멋을 모르는 것이 문제...




어느날, 밤새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지면 한강 중지도엔 아이스 스케이장이 생기곤 했다.
빙질은 좋고 오뎅천막도 있었지만 우리집에서 걸어가기엔 좀 먼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좀더 쉽게 스케이트를 타러 여의도와 영등포 사이의 샛강에 나가 얼음판을 찾아가기도 했는데, 가끔 결빙이 약한 곳에서 사람이 빠져죽는 일도 있었다.
그러면 또 겁이 나 한동안 샛강 근처에는 얼씬도 할 수가 없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내미의 겨울운동을 위하여 아버지는 자전거 한대 값을 선뜻 투자하여 스케이트를 사주셨지만, 인프라가 따라주지 않았던 시대의 현실이었다.
또 이 일은 나중에 무길도한량과 몇몇 친구들이 학교 등록금을 동원하여 스케이장을 만들었다가, 서울의 결빙일이 십여일 밖에 안될 정도로 유난히도 따뜻했던 겨울 때문에 쪽박 찬 경험의 근간이 되는 것이었다.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 --;;




그래도 그 땐 대체로 참 추웠다.
아마도 지금처럼 방한복도 시원찮기도 했지만 실제로 당시의 겨울이 지금보다도 훨씬 추웠던게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한강물이 어는 일은 거의 매 겨울 다반사였을 뿐더러 한 번은 강추위로 서울 시내 모든 학교에 휴교령이 떨어진 적도 있을 정도였다.
어느 늦은 가을날, 무길도한량의 아버지께서는 물품대금 대신 뜨게실을 한 트럭 싣고 오셨다.
대략 라면박스 크기 상자로 100개 정도의 양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날 이후 우리집의 모든 여자들은 대바늘 두 짝을 항시 휴대하고 다녔다.
아침 먹고, 점심 먹고, 간식 먹고, 저녁 먹고... 또 아침이 올 때까지 안방, 건넌방, 부엌이고 할 것 없이 두 대바늘 비비작거리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덩달아 무길도한량의 뜨개옷들의 갯수도 기하학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곤색 스웨터, 곤색 바지, 곤색 조끼, 갈색 도쿠리, 갈색 스웨터, 갈색 바지... 이번엔 녹색 도쿠리, 녹색 스웨터, 심심풀이 녹색 목도리, 이번엔 방울 달린 녹색 모자...또...또...
이에 취미를 붙인 작은 고모는 급기야 편물기계까지 구입하게 되고...
우리 어머닌 그 때 무길도한량에게 짜주신 녹색 방울모자를 아직도 간직하고 계신다. ^^




눈이 쌓이고 얼고 해도 다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어느 한 겨울날, 아버지께서는 경사진 눈길을 내려오던 중 그만 쭐끈덕 미끌어지셨다.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나란히 걷던 무길도한량이 동작이 늦어 잡아드리지 못해서 죄송했지만 다행히 다치신 데는 없으셨다.
미끌어지신 것이 괜히 무안하신지,
"야아, 그래도 내가 말이야 고등학교때 낙법을 배워서... 넘어지는 게 좀 달랐지?"
이에, 또 편안하시게 맞장구 쳐드리지 못하는 성격의 무길도한량,
"아, 예. 꼭 거북이 뒤집어지듯 넘어지시던데요?" ^^
하지만 인제는 그렇게 대답 안하고 이렇게 대답하리라 마음 먹어본다.
"예, 아버지. 봄바람에 날리는 버들개지 같으셨습니다." ^^




아무리 아름다운 눈꽃들이 사방에서 휘날리고 그 눈의 소용돌이 속에 오붓하게 고립된다 해도 아프면 그 어느 것이 예뻐 보이랴.
눈썰매 타러 간 첫째녀석이나 여느 사람이나 매 한가지로 아름다움으로 인해 다치지 않기를...
건강으로 걱정하시던 우리 오마니와 또 다른 분들은 서설(瑞雪)로 위안 받으시고, 모두 봄과 함께 벌떡 벌떡 일어나시기를 소원해본다.



(2012.02.02)

2011년 10월 29일 토요일

인생은 오십부터...

인생은 오십부터...





벌써 가을이 깊었습니다.
발바닥이 부은 탓으로 아침 산보를 몇일간 쉬었더니, 그새 거리의 나뭇잎들이 온통 제멋대로 때깔자랑입니다.
기온은 약 영상 7도.
새벽비에 포도도 촉촉히 젖고 하얀 구름들 사이로 햇빛도 간간히 내비치는게, 오늘은 걷기에 최상의 조건을 다 갖춘 듯 합니다.
허리와 다리의 근육들도 잘 쉰 덕분에 느낌이 아주 좋습니다.
아침 커피를 한 잔 하고 가뿐한 걸음걸이로 가을길에 나섭니다.




얼마전 국민학교 친구 E와 했던 이야기들이 떠올랐습니다.
다니던 대기업을 나온 그는 새로운 도약을 위해 준비하는 중에 있습니다.
옛날 푸른 나뭇잎들이 우리집 앞 젊은 나무들 가지마다 가득 나부끼던 시절, 꿈 많던 무길도한량과 밤을 새며 이야기하던 그 청춘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아니면, 멀리 타국의 이름도 모르는 깡촌에서 세월을 낚고 있는 무길도한량을 측은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요지는 한마디로 이런거 였습니다.
"너 거기서 지금 뭐하고 있는거야?" ^^




거기에 대한 저의 반론은 이러했습니다.
"나 스스로의 꿈도 중요하지만, 우리 아이들의 미래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아빠를 따라 온 우리 아이들이 자신들의 꿈을 스스로 펼칠 수 있는 때가 다가오고 있으므로, 그 때까지 뒷바라지하는 것이 나의 가장으로서의 책임이다.
가장의 형편에 따라 아이들의 미래가 제멋대로 휘둘려진다면, 그건 가장이 아이들을 망치는 꼴이 되고 만다.
너에겐 답답해 보일지 모르지만, 나에겐 지금은 아이들을 위해 투자하는 시간이다."
아하, 이렇게 글로 쓰니 좀더 명확해지는데, 아마도 그날은 전화 상태가 안좋아서 그랬는지, 아니면 우리 서로 나이가 들어 서론, 본론, 결론, 할 말이 많아져 그랬는지,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되었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오늘은 컨디션이 정말 받쳐주는 것 같습니다.
빗물에 살짝 젖은 낙엽들 사이로 내딛는 발걸음도 먼지가 일 만큼 힘차고, 이마 위로 땀도 적당히 배어 나오고, 나무들이 내뿜는 싱그러움도 즐거움을 더해줍니다.
오늘 같으면 평상시 걷는 12 km 보다도 더 많이 걸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옛날엔 속보(速步)에 쾌보(快步)로, 빨리 걷고 즐겁게 걸을 수 있었는데...
도대체 언제부터 걸음폭도 좁아지고, 속도도 떨어지고, 심지어는 걷기 조차 싫어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간 때문에 고생했던 30대 초반에도 무지 걸었지만, 오십이 가까운 이제서야 걷는 즐거움을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건강 상의 문제로 몇 번의 굴곡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거기엔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존재하였음을 알게 됩니다.
그 때 노란불을 켜고 강제로 스톱시키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여유로운 마음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처럼 가족의 절실함을 모를지도 모릅니다.
지금처럼 꿈의 소중함을 모를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무절제함과 과욕으로 더 크게 건강을 해치고 지금쯤 어느 공원묘지 한 켠에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벌써 세 바퀴가 다 되어갑니다.
딴 때는 두번째 바퀴 후 중간 지점 정도에 오면 다리에 피로감이 느껴지는데, 오늘은 아직도 그런 기척조차 없습니다.
에라이, 내친 김에 한바퀴를 더 돌기로 마음 먹으며 우리 아파트 입구를 외면하듯이 홱 지나쳐 버립니다.
한바퀴가 4.2 km 인 이 코스의 좋은 점은 중가운데 가로지르는 길이 없다는 점입니다.
한 번 돌기 시작하면, 완전히 한 바퀴 돌던지 아니면 포기하고 돌아오던지, 둘 중 하나입니다.
아니, 어쩌면 나쁜 점일 수도 있군요. ^^
여하간 오늘은 처음으로 네 바퀴에 도전해보기로 합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도 이같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가던지 아니면 말던지...




결국 무길도한량은 16.8 km 를 걷고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목표를 정하고 이루어냈다는 그 성취감은 제법 즐길만 했습니다.
허리를 다친 이후 2-3년 내 이렇게 많이 걸어본 건 처음이었으니까요.
이렇게 계속하다보면 무길도한량이 오십살 쯤 되었을 땐 한 번에 한 20 km 도 쉽게 걸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며 혼자 싱긋이 웃어봅니다.

아, 그리고...
젊었을 적에 꾸었던 꿈들은 언젠간 꼭 이루어보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단지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싶구요. (조금 늦은 것 같기도 하지만...^^)
어차피 인생은 오십부터니까 아직도 준비할 시간은 남아있지요.
그 땐 정말 꼭 한 번 날아보고 싶습니다.



(2011.10.30)

2011년 10월 16일 일요일

멍해져야 하는 시간

멍해져야 하는 시간







        멍하다: 정신이 나간 것처럼 자극에 대한 반응이 없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새로 글 쓴 것 있어?"
요즘 들어 자주 듣는 질문이다.
이런 말을 들을 때 마다, 중언부언 하며 매끄럽지 못한 글일 망정, 그래도 '내 글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뭘 하길래 그리 바빠 글 올리는 것이 뜸 할까?' 하고 내 스스로에게 자문해보기도 한다.
한 번 물어보자.
바쁘요?
쯧...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쩝. ^^




가만 생각해보면 정말 시간이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새벽별 보며 일어나 12km 를 걷고, 출근하여 잔소리 두어 마디 하고, 돌아와 집안일! --;
아이들 맞이하여 멕이고 공부 좀 감독하고, 저녁 준비하고 멕이고 치우고...
멀리 떨어져 있는 집사람과 스카이프 좀 하고, 곧 이어 한국에 계신 오마니가 로그온 상태이시면 또 스카이프 좀 하고...
그렇게 바쁜 일정은 아닌데 말이지.
더더군다나 나 보다 더 바쁜 사람이 대부분이기에, 그 정도를 불평할 계제는 아닌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나 뿐만이 아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적당히 멍해지는 시간인 것 같다.
일상으로 부터의 오만 가지 상념으로 부터 나를 해방시키고, 그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멍해지는 시간 말이다.
멍하게 높푸르게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고, 멍하게 끝없는 외침을 쏟아내는 바다를 바라보고, 멍하게 시간을 색칠하는 나뭇잎들을 바라보고, 멍하게 먼 기억의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커피잔을 바라보고, 그리고 멍하게 그저 멍하니 앉아있을, 그런 멍한 시간이...




하기야 멍해질 수 있는 것도 축복임에 틀림없다.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인생사 생활고로 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끝 없는 번민 속에서 허우적 거리는 경우는 또 얼마나 불행한 것인가.
나도 좀 멍해지는 시간이 있고 싶다구요...
하고 외치고 싶은 영혼이 얼마나 많을 지는 안봐도 훤한 사실이다.
게다가 우리는 어렸을 때 부터 멍하게 있지 않도록 철저한 훈련과 윽박지름 속에 살아오지 않았던가.
"어이, 무길도한량! 공부시간에 딴 생각야? 이리 나왓!"




물론 아무 때나 멍해지는 것은 여러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운전을 하다가, 길을 걷다가, 작업을 하다가 등의 경우엔, 중간에 멍해졌다간 충분히 위험상황을 야기할 수 있는 경우들이므로 피해야 하겠지만, 이런 때를 제외하곤 누구든지 아주 잠시만의 시간이라도 좋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조심은 하여야 한다.
직장 상사는 근본적으로 멍해져 있는 직원들을 싫어한다.
아내들은 저 양반이 또 여왕봉다방 김마담 생각하고 있나 의심할 수도 있다.




멍해지는 시간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 머리 속에 찌든 상념의 때를 털어버려야 한다.
가슴 속 틈바구니 마다 골골이 맺힌 감정의 찌끄러기들을 청소해내야 한다.
자신을 일상의 번거로움에서 격리하여 쉴 틈을 가졌으면 좋겠다.
모두가 잠시만이라도 멍해지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여기까지가 무길도한량의 모두를 위한 소소한 생각이고... ^^




무길도한량도 마찬가지로 일상에서 멍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렇게 말하면, 무길도한량은 멍해지는 시간이 없이 극도로 긴장된 생활을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아니고... --;
문제는, 요즘 들어 무길도한량은 멍해지는 시간 끝에 곧잘 정신줄 놓고 코를 골아버리는 일이 종종 발생하곤 한다는 사실이다. (어... 나이 탓인가? ^^)  
이곳 저곳에서 찍어온 사진들을 들여다 보다가, 지난 이야기들을 엮을 모티브들을 정리하다가, 인터넷으로 소재거리들을 찾다가... 잠시 멍한 상태로... 그리고 곧 이어서... 쩝. --;
그러니까 멍해지는 시간이 부족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 ^^;;

자주 글 못쓰는 이유를 만들다 봉께 별 말도 안되는... ^^;;
아주 팔자가 늘어진다고 자랑을 하지요? ^^;;
무길도한량이었습니당~ ^^




(2011.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