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오십부터래...

인생은 오십부터래... ^^

2012년 2월 29일 수요일

곶감을 먹으며 감나무를 떠올리다

곶감을 먹으며 감나무를 떠올리다







때 아닌 가을이야기 한 꼭지.

해 마다 가을이 깊을 때면 우리집 마당 드높은 감나무엔 빠알간 홍시들이 주렁주렁 주렁주렁 열리곤 했다.
긴 장대로 곧추 세워 홍시를 따기 시작하면, 아버지께선 창문 너머로로 내다보시며 말씀하셨다.
"얘, 꼭대기 것들은 까치밥이니 남겨 두거라."
우리집 장대가 턱 없이 짧아, 감나무의 절반 밖에 미치지 않음에도 항상 확인을 하시곤 했다.
어머니께선 소쿠리 쟁반에 내가 따다 실수로 떨어뜨린 홍시들을 주우시고...
"얘, 좀 살살 혀라. 떨구는 게 반이다."
주홍색 홍시는 늦가을 오후의 햇살들 사이로 말갛게 빛을 냈다.





잘 익은 홍시들은 그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시도 때도 없이 떨어지곤 했다.
밤 사이에도 떨어지긴 마찬가지였는데, 가만히 듣고 있노라 치면 그 소리가 달랐다.
툭!
이건 마당 잔디밭에 떨어지는 소리로 대개 떨어진 홍시들은 절반으로 쩍 갈라졌다.
푸석!
이건 감나무 밑에 자리한 메마른 소철나무 위로 떨어지는 소리. 간혹 성한 눔들이 발견된다.
퍽!
이건 마당가로 세워놓은 정원석들 위로 떨어지는 소리. 건질 것은 하나 없이 처참한 모습.
아이고!
이건 달밤에 감 주으러 나오신 할머니 머리에 감 떨어진 소리. 완전 뭉그러진다. ^^





덕분에 아침 햇살이 내려쬘 무렵이면 마당가에 내놓은 다딤이돌 위엔 그나마 쓸만한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홍시들이 열을 지어 놓여있곤 했다.
그 중 가장 괜찮은 것 두엇은 아버지 퇴근하시면 피로회복제로...
두엇은 가끔 마실오시는 어머니 친구분들의 스낵으로...
또 두엇은 홍시라면 입이 홍시만하게 벌어지던 우리 집사람을 위하여...
또 두엇은 가을마당을 거닐다 마당가에 쪼그려 앉는 사람들을 위하여...
'어? 감 따놓은게 있네? 맛나겠는데... 한번 먹어볼까?'
온전한 감은 먹어도 될까 눈치를 보지만, 이미 깨진 감이야... ^^
그리고 때론 반건시도 만들고, 실에 꿰어 처마 끝에 매달아 놓기도 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감나무였지만 기실 감나무를 심으신 아버지의 목적은 그 열매를 먹고자 함이 아니라, 그 나무의 자라남을 보시기 위함이라 하셨다.
말하자면 관상용이었던 셈이다.
서울 시내 주택가 마당 한가운데 3층집 높이의 감나무가 관상용이라?
그래서 어느날 무길도한량은 그것에 관해 여쭈었다.
우리 감나무가 관상용이란 무슨 뜻이온지요?
"과실나무의 열매를 먹기 위함이 아니니 말하자면 '관상용'이란 것이지, 엄밀히 말하자면 그 의미는 좀 다르단다. 눈을 즐겁게 하려면 소나무처럼 더 멋진 나무들을 심었지 않겠니?"
그렇다면 우리 감나무엔 어떤 의미가 있다는 말씀이시네요?
"그렇지, 내가 우리 마당 한가운데 감나무를 심은 뜻은..."





예로 부터 감나무는 문무충절효(文武忠節孝)의 나무라고 불리는데,
첫째, 잎이 넓어서 글씨 연습을 할 수 있으니 문(文)이 있고,
둘째, 나무가지가 단단하여 화살대를 만들 수 있으니 무(武)가 있으며,
셋째, 열매의 겉과 속이 똑같이 붉어서 표리부동하지 않으니 충(忠)이 있고,
넷째, 서리가 내리는 늦가을이 되도록 열매가 가지에 달려 있으므로 절(節)이 있으며,
다섯째, 노인이 치아를 다 잃어도 먹을 수 있으니 효(孝)가 있는 나무라는 것이다.
갑자기 우리집 감나무에서 광채가 번쩍이기 시작했다...^^
아버지께서 감나무를 심은 뜻을 알고 나니 우리집 감이 더더욱 맛이 있었다... ^^
말하자면, 감나무는 한 집안을 바로 이끌기 위한 아버지의 모토를 대변하는 셈이었다.





지난 연말, 장모님께서 보내주신 곶감과 동생네 시아버님께서 보내주신 곶감을 냉동실에 잘 보관하고 있다가, 열대지방에서 오랜만에 올라온 집사람에게 꺼내놓았다.
비닐포장을 하고 페이퍼타올로 두어겹 잘 싸둔 덕분에 벌써 두어달이 지났음에도 곶감들은 가장자리에 엷은 성에들만 끼였을 뿐, 가운데 부분은 말캉말캉하였다.
한겨울 수정과에 띄운 곶감 정도의 온도나 될까?
여하간 한 10분 상온에 놔뒀다가 먹으니 그 맛이 여전했다. (장모님, 사장어른 감사합니다.^^)
워낙에 감을 좋아하는 집사람은 곶감 꺼내먹는 재미로 매일 밤이 즐겁고... ^^
그래서 옛말에 '곶감 빼먹는 재미' 라는 표현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하간 우린 잘 먹었... 먹고 있다. (다음번을 위해 아끼느라 냉동실에 아직도 좀 남겨놓았다)





보다 편리한 생활을 위하여 아파트로 이사한 이후 우린 우리집 감나무의 소식을 모른다.
단지 그 근처가 대부분 연립주택들로 메꿔졌다는 이야기로 미루어보아 정이품송 마냥 잘 생긴 그 감나무도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는 추측만 할 뿐이다.
하지만 그 감나무가 사라졌다 하더라도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려 했던 그 이상(理想)들은 홍시로, 반건시로 우리들에게 전달이 되고, 작은 감 씨앗 속에 들어있는 하얀 숟가락처럼 우리 마음 속에 굳게 자리하고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곶감을 먹다가 그 수려한 모습의 감나무가 생각이 났다.
그 감나무를 올려다보시던 아버지의 눈빛이 생각이 났다.
 




(2012.02.29)

2012년 2월 20일 월요일

술을 취케 먹고



술을 醉케 먹고 두렷이 안자시니
億萬 시름이 가노라 下直한다
아희야 盞 가득 부어라 시름 전송하리라


                                    (정태화)


술을 취하도록 마시며 여럿이 둘러앉았으니
억만가지 시름들이 떠난다고 작별인사를 한다
아이야 잔을 가득 채워라, 시름을 이별주로 전송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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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제로서의 술...
수필가 조지 버나드 쇼도  '술은 삶을 꾸려가게끔 버티게 해주는 마취제' 라고 비슷한 뜻으로 술에 대해 이야기했다.
극작가 셰익스피어는 '맥베드' 에서 '술은 빨간 코와 잠과 오줌을 가져다준다' 고 했고...
가수 프랭클린 시나트라는 '술은 인간의 가장 나쁜 원수인데, 성경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해서..." ^^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술.
사람이 술을 즐겨야지 술이 사람을 갖고 놀면 안될텐데 말이다. ^^

아릴랜드의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시 중 유명한 것 하나를 읽어보자.


A Drinking Song


                             by William Butler Yates


Wine comes in at the mouth
And love comes in at the eye;
That's all we shall know for truth
Before we grow old and die.
I lift the glass to my mouth,
I look at you, and I sigh.


술은 입으로 들고
사랑은 눈으로 든다
우리가 늙어 죽기 전에
알아야 할 진실은 이것 뿐.
나는 잔을 들고
그대를 바라보며 한숨 짓는다.


술이 나오는 멋진 시 라면, 소월의 '님과 벗' 을  또 뺄 수 없다.


님과 벗


                        김소월


벗은 설움에서 반갑고
님은 사랑에서 좋아라.
딸기꽃 피어서 香氣로운 때를
苦草의 붉은 열매 익어가는 밤을
그대여, 부르라, 나는 마시리.


캬~
마시지 않아도 취하는 듯하다.
취하는 것 좋을씨고~ ^^

결국 인생이라는 것이 취하는 것 아니겠는가?
술의 향기에 취하고,
꽃의 아름다움에 취하고,
님의 눈빛에 취하고,
세월의 덧없음에 취하고,
사람의 따뜻한 정에 취하고,
......
앞뜰 감나무에 매달린 까치밥에 취하고,
초만원(草滿園) 중국집 탕수육 달초름한 맛에 취하고... ^^

아, 세상 참 살 맛 나지?


(2012.02.21)

2012년 2월 15일 수요일

참 점잖지 못한 것들

참 점잖지 못한 것들







제목이 좀 점잖지 못한 것 같아서 좀 뭐하다만 그래도 그냥 그렇게 쓰도록 하자.
점잖지 못하다고 말한 것엔, 생겨먹기가 그리 생겨먹은 놈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
생겨먹기로만 따지면 평생 양반집 밥상에 오르지 못할 듯한 홍합 같은 놈들은 아예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하는 이야기다.
그럼 도대체 어떤 녀석들이 점잖지 못한 것들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며칠 전 무길도한량은 W로부터 점심식사 초대를 받았다.
장소는 햄버거집.
햄버거 레스토랑이라고 쓰려다 좀 이상해서 햄버거집이라고 썼더니 더 느낌이 퀴퀴하고 이상하다.
하지만, 하여간 햄버거집.
소위 메이져급 훼스트푸드인 맥도널드나 버거킹이 아닌, 나름 이 근동에서는 제대로 만든 햄버거로 유명한 고급 햄버거집이다.

주문을 하고 기다리던 끝에 웨이터의 팔뚝에 얹혀나온 커다란 접시의 내용물은 입이 딱 벌어질만 했다.
주전자 뚜껑만한 햄버거빵 위에 집게손가락만한 두께의 다진 고기 패티를 두 개를 넣고, 그 위에 치즈와 야채와 베이컨과 토마토와 버섯을 차곡차곡 얹은 후, 다시 주전자 뚜껑만한 예의 그 빵을 덮은, 어마어마한 높이의 햄버거...
높이가 한 10 센티미터는 될까?
쓰러지지 말라고 햄버거 한가운데 깊숙히 꽂아 넣은 긴 이쑤시개가 더 비척해보였다.

두 엄지손가락으로 햄버거의 밑을 받치고 양쪽 중지, 약지, 무명지, 새끼손가락의 6개의 손가락으로 햄버거를 흔들리지 않게 잡아주고, 남은 두 집게손가락으로 햄버거의 끝단을 잡아 눌러주며 입 안으로 전진.
햄버거 먹기를 떡 먹기 만큼이나 좋아하여 나름대로는 햄버거 먹는 방법에 도가 텄다고 은근 자부하고 있었는데...

고개를 양쪽으로 도리질 쳐 목근육을 이완시키고, 양손가락을 교대로 뚜두둑 소리를 내도록 접어보고, 허공에 가볍게 뿌리며 손가락을 풀어본다.
저게 한 손에 잡힐까?
마주 앉은 W가 나의 표정을 미소를 띄고 지켜본다.
와우!
감탄사를 터뜨리며 입을 한 번 쩍 벌려 햄버거의 높이와 내 입의 크기를 가늠해보곤, 고개를 갸우뚱 하고 다시 한 번 감탄사를 날려본다.
와우!
입을 크게 벌려보았지만 암만 해도 첫 한 입에 베어문다는 것에 자신이 생기질 않는다.

W의 눈치를 슬쩍 본다.
넌 그거 어떻게 먹을건데?
"잘라서."
간단한 그의 대답은 들었지만 의문이 해결되지 않아 주변머리에 얹힌 감자튀김부터 깨작거리기 시작한다.
과연 그는 나이프를 들어 자신의 햄버거를 반으로 갈랐다.
나도 얼른 따라서 반으로 가른다.

햄버거의 유래가 독일의 도시 햄버그(함부르크)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더라...
독일 출신의 W의 와이프 L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먹던 샌드위치를 내려 놓는다.
"처음 듣는 소린데...?"
프랑크푸르터(Frankfurter: 쏘세지)가 프랑크푸르트(Frankfrut)에서, 빈(Wien: 쏘세지)이 비엔나(Vienna)에서 왔듯이 말이지...
독일 사람도 모르는 일이네...쩝.
"햄버거도 따뜻할 때가 더 맛있으니 어서 먹지?"

L의 부추김에 용기를 내서 접시에 놓인 햄버거를 들어올린다.
전통적인 공략법 대로 햄버거를 잡아 보지만 여전히 자신이 없다.
하~ 이거 너무 커서 어떻게 먹어야 될질 모르겠는데...?
실수로 내용물을 질질 흘릴까봐 미리 예방접종을 한자락 너스레로 깔아놓는다.
그리고 입을 크게 벌리고 두 집게손가락으로 햄버거를 굳게 잡아 입으로 우겨우겨 넣어본다.
하지만 끝내 맨 위 뚜껑으로 얹힌 햄버거빵은 입 안으로 함께 들어가지 못하고 만다.

건너다 보니 W는 그 높은 키의 햄버거를 재주껏 포크와 나이프로 조각조각 잘라내며 먹고 있다.
눈은 지그시 내리깔고...
아차...
울 어머니께서 상추쌈을 먹을 땐 항상 눈을 감고 입에 넣으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생각났다.

손바닥 위에 상추 한 장을 펼치고 밥을 한숟갈 올리고, 고기와 쌈장과 파무침을 얹고 보면 대부분의 상추쌈은 자신의 한 주먹보다도 커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 큰 상추쌈을 한 입에 넣기 위해 두 눈을 부릅 뜨고 아구아구 우겨넣다 보면, 그 얼굴 형상이 아마도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담은 악귀의 얼굴과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 표정을 보고, 없던 감정도 생겨날 수도 있고...
그러니 상추쌈을 먹을 때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눈을 감으라는 말씀.

요즘 삼겹살이라면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만큼 미쳐 돌아가는 한국사회가 왜 그렇게 자극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으로 돌아가는가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나 보다.
그 사이 좋던 사람들도 삼겹살 회식 한 번 하고 나면 사이가 더 벌어지는 이유가...
마주보고 앉아 서로 열심히 눈을 부라려대니 안나빠질래야 안나빠질 수가 없겠다. ^^
이혼율도 높다는데, 특히 부부 사이에 삼겹살 마주 앉아 먹지 말자.
아니면 삼겹살을 같이 먹어도 상추쌈은 해서 먹지를 말던지...

옆길로 빠졌나? ^^
여하간 한국에선 상추쌈, 미국에선 햄버거... 이런 음식들은 참 점잖지 못한 것들이라 하겠다.
서로 눈 치켜 뜨고 먹는 음식들을 우리 사회를 위해서 퇴출이라도 시켜야 하는 것일까?
좋은 맘으로 같이 음식 먹으러 와서 나갈 때는 서로 삐져서 나가게 하는...

W는 여전히 눈을 지긋이 내려깔고 예의 그 햄버거를 나이프로 조각조각 잘라내고 포크를 이용해 재근재근 먹고 있다.
나는 여전히 양손으로 햄버거를 들고 접시 위로 내용물들을 뚝뚝 흘려가며 먹고 있다.
눈 깔아. 눈 깔아...
눈 부릅 뜬 거 이미 봤을거야.
그래도 지금부터라도 눈 깔아, 눈깔아...

통재로다! 오늘 세상에 점잖지 못한 것들이 무길도한량의 품위를 손상시키는구나... 쩝.






(2012.02.15)

2012년 2월 13일 월요일

He Knows My Name

He Knows My Name







얼마 전, 어머님께서 심장판막수술 이후 많이 안좋으시던 때의 일이다.
아버님께선 이사야서에 나오는 한 성경구절을 붓글씨로 쓰시고 족자로 만드셨고, 어머님께서는 그 족자를 걸어놓고 약해질 때 마다 그 구절을 읽으며 마음에 힘을 얻으셨다고 한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이사야 41:10)"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빽 보다도 더 든든한 빽이 어디 있으랴.
권세 높은 미국 대통령의 빽 보다도, 돈 많은 최고의 갑부 빌 게이츠의 빽 보다도, 지켜주시고 위안해주시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다시 일어서기에 든든한 의지가 되었던 것이다.

시편 23장 4절에도 보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하고 나와있다.


재빠른 무길도한량도 얼른 부탁드려 똑같은 족자를 갖게 되었다. ^^


창조주의 든든한 빽이 있는 사람들은 걱정할 일이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그분께서 절 아주 잘 알거든요...
그리구요, 제가 필요해 부르면 바로 바로 응답해주시거든요..." ^^
그런 노래다.

http://www.youtube.com/watch?v=NXKWsfbizB4&feature=related (클릭)
  

I have a Maker                               나에겐 창조주가 계십니다
He formed my heart                      그분께서 내 마음을 빚으셨지요
Before even time began               시간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My life was in His hands               내 생명은 그분의 손 안에 있었어요

He knows my name                       그분께선 내 이름을 아신답니다
He knows my every thought         그분께선 나의 모든 생각을 아시지요
He sees each tear that falls         그분께선 내 눈물 한방울 한방을을 보시고
And hears me when I call              내가 부를 때 마다 응답해주신답니다


I have a Father                              나에겐 아버지가 계십니다
He calls me His own                      그분께서 날 당신의 친자라고 불러주시죠
He'll never leave me                      그리고 그분께선 내가 어디로 다니던지
No matter where I go                     결코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답니다

He knows my name                       그분께선 내 이름을 아신답니다
He knows my every thought         그분께선 나의 모든 생각을 아시지요
He sees each tear that falls         그분께선 내 눈물 한방울 한방울을 보시고
And Hears me when I call              내가 부를 때 마다 응답해주신답니다

(2012.02.13)

2012년 2월 10일 금요일

늙었다 믈너가쟈



늙었다 믈너가쟈 마음과 의론하니
이 님을 바리고 어드러로 가쟛 말고
마음아 너란 잇거라 몸만 몬저 가리라


                                      (송순)


나도 늙었으니 이제 물러나야지 하고 마음과 의논하였더니
이 님을 버리고 어디로 가자는 말인가 한다
마음아 너는 그럼 남아 있거라, 몸만 먼저 갈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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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순은 중종때 과거에 올라 명종때 벼슬이 우참찬에 이르렀다.
하지만 윤원형 일파의 모의로 피비린내 나는 을사사화(乙巳士禍)를 목격하게 되니, 정치판의 이런 꼴 저런 꼴 보기 싫고 어디 깊은 두메산골에나 숨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간절도 했겠다.
하지만 모리배에 휘둘리는 임금을 버리고 떠나려니 속마음은 편치 않고...

그래서 그는 시조로 표현한대로 마음은 님과 함께 두고 몸만 떠나버리기로 하고, 전남 담양으로 내려가 은거하며 자신이 지은 면앙정(人+免仰亭)에서 시를 지으며 세월을 낚았다고 한다.
무길도한량과도 비슷한 점이 있다. ^^

어제는 두 아이들이 아빠의 생일을 미리 당겨서 차려준다고, 생일케이크에 무지개 초도 무려 마흔 아홉개나 꽂고 카드니 선물이니... 해서 나름대로 용돈을 털었다.
둘째는 아빠 모르게 준비한다고 비를 맞으며 한시간을 넘게 걸어 케익을 사오고...
마흔 아홉번째 이빨 빠진 날.... (이빨이 많기도 하네...^^)
별로 이루어낸 것 없이 또 한 살을 덜컥 먹어버리고 만다.

등전만리심(燈前萬里心)
몸 떠나온 지 이제 몇 년이나 되었을까나?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는 하고 있지만 마음은 항상 먼 그곳을 그리워 하며 살고 있다.
못난 칠득이 같은 무리들이 나라를 망치든, 쓰레기 같아 경멸해 마지 않는 또 다른 무리들이 세상을 휘젓든, 그곳은 아직도 무길도한량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보고 싶지 않아도 보지 않을 수 없고, 듣고 싶지 않아도 귀 기울이는 그곳.
하지만 그것은 내가 태어난 지리적인 요인 때문이 아니라 나의 부모 형제가 아직도 정 붙이고 살고 있는 감성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려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시인이 마지막에 노래했듯 그려지길 소원한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나의 마음 속에도 소박한 면앙정(人+免仰亭) 한 채를 지어본다.




(2012.02.10)

2012년 2월 6일 월요일

The Lord's Prayer (주기도문)

The Lord's Prayer (주기도문)







1935년 미국의 Albert Hay Malotte 은 주기도문에 곡을 붙였다.
그리고 당시 톱가수였던 John Charles Thomas가 라디오방송에서 이 노래를 부른 이후 신앙적으로 감동받은 수 많은 가수들이 자신의 앨범에 포함시키는 유명한 곡이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흑백TV 시절 'KBS 주말의 명화'에, 최고의 테너 Mario Lanza가 주연한 뮤지컬 코메디  Because You're Mine (1952) 이라는 영화 속 한 장면에서 소개가 된 적이 있다. (불행히도 한국말 제목이 무엇이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이 영화에서 미군에 징집된 오페라가수역으로 나오는 Mario Lanza 는 여러가지 주옥같은 곡들을 시원스레 불러주는데, 특히 교회에서 The Lord's Prayer (주기도문)을 부르는 장면이 사람들의 가슴에 강하게 각인되었다.

이 노래는 찬송가식으로 첫머리를 따 Our Father 라고 불리기도 한다.
아래 동영상 보시고 감화 감동되시는 하루가 되시길... ^^

http://www.youtube.com/watch?v=YDxvBNR7ciI  (클릭해주세용~)



The Lord's Prayer




Our Father, who art in Heaven
Hallowed by Thy name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Give us this day our daily bread
And forgive us our debts
As we forgive our debtors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
For Thine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ever


Amen



(2012.02.06)

2012년 2월 3일 금요일

겨울이야기

겨울이야기






서울의 수은주가 몇십년만의 강추위를 기록할 즈음 이곳엔 폭설이 쏟아졌다.
며칠 동안이나 눈꽃들이 하늘에서 맴돌며 맴돌며 쏟아져 내렸다.
환경오염을 막기 위해 염화칼슘 같은 제설제 사용을 금지한 이후 첫 큰 눈이라 어쩔까 싶었는데, 역시나 광주리로 쏟아붓는 눈을 감당하지 못하고 제설차량들도 그만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차도와 보도의 구분도 사라질 만큼 눈이 쌓이자 체인 친 suv들만 제 세상을 만난 듯...
아니네...
휴교령이 떨어져 일주일을 놀게 된 아이들과 덩달아 뛰어대는 강아지들이 더 즐거워 보인다.
경사 난 우리 첫째는 근처 골프장 언덕으로 아이들과 눈썰매 타러 가고...




우리도 어렸을 땐 눈만 오면 신이 났고 겨울이 즐거웠다.
지금이야 전국에 스키다 눈썰매다 해서 겨울을 즐길 곳이 많지만 딱히 갈 곳이 없고 교통도 불편했던 예전엔 나무판 밑에 굵은 철사를 붙여 만든 썰매나, 끽 해야 아이스 스케이트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마땅치 않으면 질질 흐르는 시퍼런 코를 소매 끝으로 바짝 닦아가면서 온동네 쏘다니며 딱지치기, 구슬치기, 연날리기, 팽이돌리기 같은 것들이 우리들의 재미였다.
아, 코 밑을 꺼멓게 그을리는 불깡통 돌리기도 빼놓을 수 없겠다.




그 중 나는 팽이돌리기를 무척 좋아했다.
나무팽이들은 나무를 깎아 만든 몸통을 잘 골라 구입하여 위 아래로 총알심을 박아 만들었다.
그리고 돌려보아 팽이가 떨지 않고 잘 도는지를 살피는 중심교정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 후에야 울긋불긋한 크레용으로 색깔을 칠하여 자기만의 팽이로 탄생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찍기' 종목으로 들어가면,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팽이가 뽀개지는 일도 있었기에, 다치지 않도록 평상시에 왁스를 칠하기도 하여 매끄럽게 표면을 유지해주는 등 정성을 쏟기 때문에 더 애착이 갔었는지도 모르겠다.
반면에 톱밥팽이는 모든 것이 완성된 상태로의 일체품으로 나왔기 때문에 별 애착이 갈 수가 없었다.
나무팽이들이 좀더 편리하지만 못생긴 톱밥팽이들에게 차츰 자리를 내주면서 개성은 사라지고 재미는 줄어들고 말았다.
멋을 모르는 것이 문제...




어느날, 밤새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지면 한강 중지도엔 아이스 스케이장이 생기곤 했다.
빙질은 좋고 오뎅천막도 있었지만 우리집에서 걸어가기엔 좀 먼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좀더 쉽게 스케이트를 타러 여의도와 영등포 사이의 샛강에 나가 얼음판을 찾아가기도 했는데, 가끔 결빙이 약한 곳에서 사람이 빠져죽는 일도 있었다.
그러면 또 겁이 나 한동안 샛강 근처에는 얼씬도 할 수가 없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내미의 겨울운동을 위하여 아버지는 자전거 한대 값을 선뜻 투자하여 스케이트를 사주셨지만, 인프라가 따라주지 않았던 시대의 현실이었다.
또 이 일은 나중에 무길도한량과 몇몇 친구들이 학교 등록금을 동원하여 스케이장을 만들었다가, 서울의 결빙일이 십여일 밖에 안될 정도로 유난히도 따뜻했던 겨울 때문에 쪽박 찬 경험의 근간이 되는 것이었다.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 --;;




그래도 그 땐 대체로 참 추웠다.
아마도 지금처럼 방한복도 시원찮기도 했지만 실제로 당시의 겨울이 지금보다도 훨씬 추웠던게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한강물이 어는 일은 거의 매 겨울 다반사였을 뿐더러 한 번은 강추위로 서울 시내 모든 학교에 휴교령이 떨어진 적도 있을 정도였다.
어느 늦은 가을날, 무길도한량의 아버지께서는 물품대금 대신 뜨게실을 한 트럭 싣고 오셨다.
대략 라면박스 크기 상자로 100개 정도의 양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날 이후 우리집의 모든 여자들은 대바늘 두 짝을 항시 휴대하고 다녔다.
아침 먹고, 점심 먹고, 간식 먹고, 저녁 먹고... 또 아침이 올 때까지 안방, 건넌방, 부엌이고 할 것 없이 두 대바늘 비비작거리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덩달아 무길도한량의 뜨개옷들의 갯수도 기하학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곤색 스웨터, 곤색 바지, 곤색 조끼, 갈색 도쿠리, 갈색 스웨터, 갈색 바지... 이번엔 녹색 도쿠리, 녹색 스웨터, 심심풀이 녹색 목도리, 이번엔 방울 달린 녹색 모자...또...또...
이에 취미를 붙인 작은 고모는 급기야 편물기계까지 구입하게 되고...
우리 어머닌 그 때 무길도한량에게 짜주신 녹색 방울모자를 아직도 간직하고 계신다. ^^




눈이 쌓이고 얼고 해도 다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어느 한 겨울날, 아버지께서는 경사진 눈길을 내려오던 중 그만 쭐끈덕 미끌어지셨다.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나란히 걷던 무길도한량이 동작이 늦어 잡아드리지 못해서 죄송했지만 다행히 다치신 데는 없으셨다.
미끌어지신 것이 괜히 무안하신지,
"야아, 그래도 내가 말이야 고등학교때 낙법을 배워서... 넘어지는 게 좀 달랐지?"
이에, 또 편안하시게 맞장구 쳐드리지 못하는 성격의 무길도한량,
"아, 예. 꼭 거북이 뒤집어지듯 넘어지시던데요?" ^^
하지만 인제는 그렇게 대답 안하고 이렇게 대답하리라 마음 먹어본다.
"예, 아버지. 봄바람에 날리는 버들개지 같으셨습니다." ^^




아무리 아름다운 눈꽃들이 사방에서 휘날리고 그 눈의 소용돌이 속에 오붓하게 고립된다 해도 아프면 그 어느 것이 예뻐 보이랴.
눈썰매 타러 간 첫째녀석이나 여느 사람이나 매 한가지로 아름다움으로 인해 다치지 않기를...
건강으로 걱정하시던 우리 오마니와 또 다른 분들은 서설(瑞雪)로 위안 받으시고, 모두 봄과 함께 벌떡 벌떡 일어나시기를 소원해본다.



(2012.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