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오십부터래...

인생은 오십부터래... ^^

2011년 8월 30일 화요일

넙으나 너른 들회




넙으나 너른 들회 흐르느니 물이로다
人生이 뎌르로다 어드러로 가는게오
아마도 도라올 길히 업스니 그를 슬허하노라


                                               (무명씨)


넓으나 넓은 들에 흐르는 것이 물이구나
인생도 저렇게 흘러가는데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인가
아마도 돌아올 길이 없으니 그것이 슬프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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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최희준은 '하숙생'을 부를 때 인생을 음미하는 듯, 지긋이 눈을 감고 이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그런 모습이 이 노래에 깊이를 더했던 것 같다.
한 번 동영상으로 보시길...

http://www.youtube.com/watch?v=WktYRl9WpSY&feature=related (클릭)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없이 흘러서 간다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없이 흘러서 간다

요즘 새로운 787 여객기를 열심히 만들어내고 있는 이곳 조립공장 활주로 건너편에는 여러곳에서 날아온 비행기들이 한 떼 모여있다.
무길도한량이 비행기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한눈으로만 봐도 그들은 꽤 오래 전에 생산된 비행기들임을 알 수가 있다.

그들은 그곳에서 조종설비를 제외한 의자니 천장에 붙은 수납캐빈이니 하는 모든 내장재를 떼어내고 깨끗이 청소를 한 뒤 모든 창문과 출입구를 밀봉을 한다.
그리곤 비행기 전체를 하얀색으로 다시 페인트 칠을 하여 과거를 지워낸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비행기는 어느날 활주로를 차고 올라 아리조나주의 모하비사막까지의 마지막 비행을 하게 된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 재활용 콜을 받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빼면 이제 그들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고 영면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공장 한귀퉁이에서 한 달여의 시간 동안 조금씩 조금씩 탈바꿈을 하며 변해가는 비행기들.
그리고 십중 팔구 마지막일 그 비행을 위해 막상 활주로를 박차고 올라 구름 사이로 사라져가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짠해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Well done, good and faithful servant."


인생도 또한 그러하리라.
충성하고 열심히 살다가 마지막에 그 한마디 들을 수 있다면, 그 인생 헛되진 않았으리라.
......

오늘도 아침길을 걷다가 하얀 옷을 입은 한 비행기의 마지막 비상을 본다.
그곳에서 편히 쉬길...
굿바이.



 (2011.08.31)

2011년 8월 26일 금요일

그믐달 뜬 새벽


그믐달 뜬 새벽





새벽녘 푸른 어스름 자락 위로 연노랑 하루가 갓 밝아오는데,
까맣게 키가 큰 나무 왼쪽 어깨 위엔 그믐달 하나 간들 걸려있다.
참 예쁘기도 하다.
그 휘어진 곡선의 단아함이며 금가락지처럼 빛나는 색깔하며...
황진이의 눈썹이 저러 하였을까? ^^

옛적 중국 주나라에선 여인들이 본래의 눈썹을 제거하고 검푸른색으로 눈썹을 다시 그려넣는 것이 유행하였는데, 여기서 누에나방(蛾)의 더듬이 모양의 눈썹(眉)을 최고로 쳤다.
여기서부터 아미(蛾眉)라는 단어가 미인(美人)의 상징어가 되었다.
누에나방의 더듬이를 보면 그 모습이 마치 초승달 같은 모습(아래 사진 참조)을 하고 있기 때문에 '미인=아미=초승달 눈썹', 이런 공식으로 연결되지 않았나 싶다.


(사진출처: http://www.123rere.com/File/Board/200407)

무길도한량이 새벽녘 동쪽 하늘에서 본 것이야 초승달이 아닌 그믐달이 틀림없지만, 그 예쁘기가 초승이니 그믐이니 따질 것도 없는 것이라서 이야기를 내어봤다.
뭐, 어차피 초승달 뒤집으면 그믐달 아니겠는가? ^^
여하간 그 달이 한 남정네의 마음을 움직일 만큼 아름다웠다는 얘기.

아름다운 달을 보며 이런 감상에 젖는 이가 세상에 어디 무길도한량 뿐이랴?
유명한 소설가 나도향은 '그믐달' 이란 제목으로 '조선문단' 이란 잡지에 짧은 수필을 쓴 적이 있는데, 그것은 이렇게 시작을 한다.

"나는 그믐달을 몹시 사랑한다.

그믐달은 요염하여 감히 손을 댈 수도 없고, 말을 붙일 수도 없이 깜찍하게 예쁜 계집 같은 달인 동시에 가슴이 저리고 쓰리도록 가련한 달이다...(후략)"

과연 그는 당대의 문장가이다.
무길도한량이 표현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한 문장으로 다 표현해버렸으니...
아, 어찌 하늘은 무길도한량을 세상에 내고 또 나도향을 내었단 말인가? --;;;
같은 하늘은 아니라고...?
에헴, 여하간, 좌우지당간에 그의 표현에 삐침 하나 더하고 뺄 곳이 없다.

얼마전 조선의 화가 신윤복의 '월하정인도(月下情人圖)'에 나타난 달의 모습을 보고 그림의 제작시기를 밝혀낸 것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독특하게 표현된 달의 모습을 보고 천문학자는 월식 때일거라는 추측 아래 중요 천문현상까지 기록한 '승정원일기' 와 대조, 정확한 배경날짜를 알아낸 것이다.
한편, 우리의 그믐달은 그의 또 다른 그림 '야금모행도(夜禁冒行圖)'에 등장한다.


신윤복, 야금모행도(夜禁冒行圖)

보시다시피, 그믐달은 동산 위에 깔린 푸른 어스름 위로 떠올라 있고 밤 사이 기생과 거나하게 마시던 한량은 야금(夜禁: 야간통행금지)를 무릅쓰고(冒) 길을 나서는(行) 모습이다.
밤 열시(2경)쯤에 통금을 알리는 인정(人定)을 치고 새벽 4시경 (5경)에 파루(罷漏)를 하였으며 위반자는 시간 때에 따라 곤장 10~30대의 형을 받았으니 '무릅쓴다'는 표현이 적절도 하겠다.
왼쪽엔, 궁인(宮人) 중 홍의를 입은 사람은 야금위반 곤장을 면케 해주었다는 규칙이 있었던 바, 술 취한 한량과 기생의 2차 나들이에 편의를 봐주어 한량이 감사의 표시를 하는 듯한 모습이다.

하지만...
저 달은 알고 있다, 네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
아마도 저 한량의 부인은 지금쯤 빨래방망이나 다듬이 방망이 하나 곧추 세우고 안방문 앞에 좌정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잠시 안으로 드시지요. 나으리."
"네, 부인."
퍽! ^^

또 가슴이 숨뿡 닳아버린 애절한 그믐달을 보며 시인 천양희는 이렇게 노래했다.


그믐달




달이 팽나무에 걸렸다


어머니 가슴에 
내가 걸렸다


내 그리운 산(山)번지
따오기 날아가고


세상의 모든 딸들 못 본 척
어머니 검게 탄 속으로 흘러갔다


달아 달아
가슴 닳아


만월의 채 반도 못 산
달무리진 어머니


어머니...
그 어머니의 등에 엎히어 가면서 아이는 달을 본다.
엄마, 달이 자꾸 따라와.
엄마의 걸음이 빨라지면 달도 빨리 쫓아오고, 엄마의 걸음이 늦어지면 달도 천천히 쫓아오고...
아이는 자신의 갈 길을 가지 않고 자꾸만 따라오는 달을 불안한 표정으로 올려다 본다.
엄마, 달이 자꾸 따라와.
어머니는 아이를 업고 달을 업고 밤길을 갔다.




그 아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살아간다.
달은 얼음칼처럼 날카로와졌다가도 호박처럼 둥그래졌다간 다시 스러지면서 잊혀질만 하면 또 다시 소생하길 반복한다.

아이는 지금 달보다 육펜스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달은 여전히 보이건 보이지 않건 언제나 저만치의 자리에서 아이를 따라온다.
길바닥에 떨어진 육펜스를 찾으려 숙였던 고개를 들고 이제 다시 달을 바라볼 것인가?
낡고 깃털이 다 빠져버린 날개를 펼치고 달을 향해 휘적휘적 어깨짓을 할 것인가?
달이 저만치서 내려본다.

예쁜 그믐달이 뜬 새벽이다.

(2011.08.26)

2011년 8월 21일 일요일

Sweetly Broken

   Sweetly Broken


                                                                  by Jeremy Riddle


"broken" 이라는 단어는 '부러진', '꺾인' 하는 뜻으로 사용되어진다.
예를 들자면,
broken arm : 부러진 팔
broken dream : 꺾인 꿈
등등 인데, 예에서 보듯이 육체적인 고통, 심적인 고통을 수반한다.
그런데, 부러지고 꺾어지긴 했는데 아프지 않고 달콤한, 기분 좋은 느낌이 있을 수 있을까?
Sweetly Broken 이란 결국 자신을 꺾어버리고 하나님께 항복하고 순한 양이 됨을 이야기 한다.
조용히 듣다보면 눈물이 흐르는 노래.
...? 
들어도 안흐른다고?
그럼 흐를 때까지 계속 듣도록! ^^


http://www.youtube.com/watch?v=O5_Z3ZZYLDc (클릭!)




TO THE CROSS I LOOK AND TO THE CROSS I CLING
OF ITS SUFFERING I DO DRINK
OF ITS WORK I DO SING


ON IT MY SAVIOR BOTH BRUISED AND CRUSHED
SHOWED THAT GOD IS LOVE
AND GOD IS JUST


AT THE CROSS YOU BECKON ME
YOU DRAW ME GENTLY TO MY KNEES, AND I AM
LOST FOR WORDS SO LOST IN LOVE
I AM SWEETLY BROKEN WHOLLY SURRENDERED


WHAT A PRICELESS GIFT UNDESERVED LIFE
HAVE I BEEN GIVEN
THROUGH CHRIST CRUCIFIED


YOU CALLED ME OUT OF DEATH
YOU CALLED ME INTO LIFE
AND I WAS UNDER YOUR WRATH
NOW THROUGH THE CROSS I'M RECONCILED

AT THE CROSS YOU BECKON ME
YOU DRAW ME GENTLY TO MY KNEES, AND I AM
LOST FOR WORDS SO LOST IN LOVE
I AM SWEETLY BROKEN WHOLLY SURRENDERED

AT THE CROSS YOU BECKON ME
YOU DRAW ME GENTLY TO MY KNEES, AND I AM
LOST FOR WORDS SO LOST IN LOVE
I AM SWEETLY BROKEN WHOLLY SURRENDERED

IN AWE OF THE CROSS I MUST CONFESS
HOW WONDROUS YOUR REDEEMING LOVE AND
HOW GREAT IS YOUR FAITHFULNESS


AT THE CROSS YOU BECKON ME
YOU DRAW ME GENTLY TO MY KNEES, AND I AM
LOST FOR WORDS SO LOST IN LOVE
I AM SWEETLY BROKEN WHOLLY SURRENDERED


AT THE CROSS YOU BECKON ME
YOU DRAW ME GENTLY TO MY KNEES, AND I AM
LOST FOR WORDS SO LOST IN LOVE
I AM SWEETLY BROKEN WHOLLY SURRENDERED

I'M BROKEN FOR YOU
I'M BROKEN FOR YOU MY LORD
JESUS, WHAT LOVE IS THIS
I AM SWEETLY BROKEN


(2011.08.21)

Amazing Grace

Amazing Grace (My chains are gone)


                                                                by Chris Tomlin







두 말이 필요없는, 무길도한량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
우리가 한국에서 아는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편집하고 더 첨가하여 새롭게 만들었다.
My Chains Are Gone 이란 부제도 덧붙이고...
원곡도 좋지만 새 버전도 어메이징하기 이를데 없다.
약간 깔깔한 Chris Tomlin의 목소리도 좋고...
나도 좀 저런 목소리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럼, 아마 지금쯤 어느 시골 교회 한 귀퉁이에서 기타 치고 있을까? ^^


http://www.youtube.com/watch?v=Y-4NFvI5U9w (클릭)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I once was lost, but now I'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Twas grace that taught my heart to fear
And grace my fears relieved
How precious did that grace appear
The hour I first believed


My chains are gone
I've been set free
My God, my Savior has ransomed me
And like a flood His mercy reigns
Unending love, Amazing grace



The Lord has promised good to me
His word my hope secures
He will my shield and portion be
As long as life endures


My chains are gone
I've been set free
My God, my Savior has ransomed me
And like a flood His mercy reigns
Unending love, Amazing grace

My chains are gone
I've been set free
My God, my Savior has ransomed me
And like a flood His mercy reigns
Unending love, Amazing grace



The earth shall soon dissolve like snow
The sun forbear to shine
But God, Who called me here below
Will be forever mine
Will be forever mine

(2011.08.21 re.)

2011년 8월 16일 화요일

둘째의 오믈렛



둘째의 오믈렛








"아빠, 어서오세용~"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둘째 녀석이 부엌에서 기웃하며 소리지른다.
말 끝이 올라가는 걸 보니 기분이 좀 나아진 모양.
아침에 나가면서 늦잠 잔다고 야단치고 나갔는데, 그새 좀 풀어진 듯 하다.
하기야 나도 저 땐 틈만 나면 낮잠 자고, 늦잠 자고, 저녁밥만 먹고 나면 잠들고...
잠자는 숲속의 왕자가 안된게 신기할 따름이다.

녀석은 그동안 어깨 너머로 배운 실력발휘를 하겠다고 두 팔을 걷어부쳤다.
"아빠, 조금만 기다려. 내가 맛있는 오믈렛 해줄께..."
슬쩍 부엌을 들여다보니 도마 위에 양파와 햄을 잘게 썰고 있었다.
밥 공기 안에 날계란 두 개를 담아놓고...
그 정도 양이면 계란 두 개론 좀 부족할거다 하고 얘기를 해줄까 하다가 그냥 놔두기로 한다.
무길도한량도 이젠 요리실력이 웬만큼 늘어서 탁! 보면 척! 안다. ^^





나는 우리 부모님께 무엇을 해드린 적이 있었던가?
슬하에 있을 땐 아마도 한 번도 없지 않았을까 싶다.
그것은 우리집엔 워낙 층층으로 여자가 많았기도 하지만, 사내녀석이 고추 떨어질라고 부엌에서 얼씬거린다고 힐난하시던 할머니의 반(反)페미니즘적 사고의 발현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가 멀리 플로리다에 가 한동안 있을 때에, 우리 부모님께선 노구를 이끌고 열여섯 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우리를 위안하러 와주셨다.
인턴생활로 매일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는 집사람을 대신하여 정의의 사도 무길도한량, 후라이팬 손잡이는 잡았으나...

아마 리포터가 있었다면 이렇게 인터뷰를 했을 것이다.
리포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런 일에 뛰어들게 되었습니까?
무길도한량: 아, 예. 우덜은 그저 이가 없으면 잇념으로 한다는 거쥬, 잇념으로...





분명한 것은 잇몸은 분명 이와는 달랐다는 것이다.
무길도한량은 나름 자신의 아이디어를 짜내어 식단의 규격화를 추구하였다.
아침: 쏘세지 데친 거, 계란 후라이 또는 삶은 거, 밥, 국물은 있으면 먹고 없으면 안먹는다.
점심: 라면 (반론 없음), 김치
저녁: 뭐든지 무길도한량이 만드는 거, 김치, 밥, 부모님이 가져오신 김. 이상.
그리고 넉살 좋게 이렇게 말하였다.
먹는게 중요한 건 아니잖유? 보고싶은 사람들을 만났다는 게 중요하지... ^^

당시 주방장 무길도한량의 저녁메뉴는 이러했던 것 같다.
카레, 카레, 김치볶음밥, 계란볶음밥, 카레, 계란국, 오뎅국, 다시 계란국, 오뎅국(이번엔 계란 풀어서), 카레, 짜장, 부대찌게...
열흘쯤 지나자 무던하게 견디시던 백성들 사이에 분란의 소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야, 암만 식당 가면 다시다 많이 넣는다 해도 한번 가보았으면 좋겠다."
"솔직히 네가 해주는 밥, 괜찮긴 한데 좀 맛이 없다.(???)"
아니, 무길도한량이 열심히 만드는데 만족하지 못하신단 말씀인가?




여하간 한식당에 가자는 제안은 무길도한량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구성원의 만장일치로 통과되어 결국 우리는 차를 몰아 그 동네 제법 한다는 한식당을 찾아갔다.
된장찌게도 시키고 갈비도 굽고 탕수육도 시키고 오징어볶음도 시키고...
둘째녀석의 대표 기도가 끝나고 석쇠에서 지글지글 갈빗살이 익어가자, 비리리리 하시던 부모님의 안색에 화기가 다시 돌기 시작하고 아이들의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으며 온 가족에게 생기가 넘쳐 흘렀다.

무길도한량?
저도 왜 안먹고 싶었을까...
단지 부모님 앞에서 꿋꿋하게 잘 살고 있다는 표를 내기 위해 고집을 부린거지...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먹는 것도 역시나 중요했다.




"아빠, 맛 없으면 안먹어도 돼."
녀석은 조금 불안한 모습으로 오믈렛 접시를 내쪽으로 내민다.
"맛있어 보이는데, 뭐."
반달 모양으로 접힌 오믈렛은 제법 들어간 양파와 햄 덕분으로 두둑해 보인다.
계란은 태우지 않고 노릇노릇 잘 부쳐 내었다.
오믈렛 위에 토마토케챂을 갈짓자로 짜얹으면서 마음을 다져 먹는다.
잔소리 하지 않기. 잔소리 하지 않기. 잔소리 하지 않기...
무조건 칭찬하기. 무조건 칭찬하기. 무조건 칭찬하기...

그리고 녀석에겐 입속에 침이 고이는 시늉을 하며 오믈렛을 젓가락으로 크게 잘라낸다.
한 입을 벌려 오믈렛을 가져오는 동안 오믈렛에서 양파와 햄 조각들이 마구 떨어져 내린다.
계란이 부족하니 양파와 햄이 따로 놀지...
말을 하지 않고 그냥 입 안으로 쑤욱 집어넣는다.
싱거워... 소금, 소금... 파도 좀 넣어주지...
칭찬하기, 칭찬하기, 칭찬하기...




녀석은 여전히 씹고 있는 나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나는 한쪽 눈을 실눈으로 뜨면서 볼따귀에 가득한 오믈렛으로 입을 열지 못하는 척, 녀석에게 천천히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워준다.
녀석의 입가에 그리고 눈가에 미소가 번져간다.
"정말?"
"오, 정말 맛있네... 이건 진짜 와우인데?"
나는 순식간에 오믈렛 한덩이를 먹어버린다.
게걸스럽게...
그리고 연방 고개를 끄덕이며 맛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와, 인제 오믈렛은 아빠보다 더 잘 만드는 걸...?"
"다음에 또 해줄께. 먹고 싶을 때 이야기 해."
오호! 그건 생각 좀 더 하기로 하자... ^^
여하튼 칭찬하기, 칭찬하기, 칭찬하기....
칭찬은 코끼리도 춤 추게 만든다고 하잖은가.




(2011.08.16)


2011년 8월 11일 목요일

갈길히 머다 하나



갈길히 머다 하나 뎌 재 넘어 내 집이라
細路 松林의 달이조차 도다 온다
가득의 굴먹는 나귀를 모라 므삼하리


                                                       (무명씨)


갈길이 멀다 하나 저 고개만 넘으면 내 집이다
오솔길 솔밭 사이로 달까지 돋아 길을 밝혀준다
가뜩이나 제대로 먹이지 못한 나귀를 재촉하여 무엇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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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지방의 숨 막히는 폭염과 습도와 싸우다 돌아온 아내는 무길도에 빠져들었다.

긴 팔을 입어야 할지, 짧은 팔을 입어야 할지 조금은 고민스러우면서도 쾌적한 기온.
쬐어도 쬐어도 덥게 느껴지지 않는 따뜻한 햇볕.
나무들 우거진 숲을 지나며 신선한 나무향을 입은 맑은 공기.
가끔씩 바람에 실려오는 먼 갯내음.
그리고 속세의 번잡함과 소란함을 벗어난 평화로움...
(쓰다보니 좋은 말은 다 골라 썼군. ^^;;)

그래서, 구름도 한 점 없이 맑은 휴일 오후, 우리는 도서관 뒷쪽에서 시작하는 걸치(gulch: 침식으로 만들어진 협곡)로 산보를 나가기로 했다.
이미 한번 92번가 공원까지의 구간을 가본 적이 있는 첫째 녀석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앞장을 섰다.
나를 따르라!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전나무들 틈 사이로 하늘 가장자리를 보면서, 우리는 최소 수십만년 동안 자연이 조금씩 조금씩 깎아내어 만든 깊은 골짜기의 시냇물을 따라 걸어갔다.
서늘한 골짜기의 기온에 무릎 보다도 높이 자란 고사리들...
바다까지 이어지는 걸치를 따라 우리들의 재잘거림도 이어지고...
아름다운 자연은 신이 주신 선물, 어쩌고 저쩌고... ^^

한 30분이나 지났을까?
우리는 어느새 하늘이 보이지 않는 숲길로 들어섰고, 비가 그친지 열흘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마르지 않은 진흙길을 군데군데 지나면서 길은 점차 험해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맨 앞에서 발걸음도 가볍게 나아가던 첫째 녀석이 곤혹스런 표정으로 돌아섰다.
"두갈래 길인데 어느쪽인지 모르겠어..."
"92번가 공원이 걸치 위에 있으니 올라가는 길 아니겠어?"
정세파악에 일가견이 있는 아빠, 무길도한량이 앞장서서 언덕 위로 향한 길로 가기 시작했다.

길은 점차 깎아지른 걸치의 벽 허리께를 향하고, 길폭은 점점 좁아들어 우리는 쓰러져 가로누은 나무를 타고 넘기도 하며 두 발보다 네 발을 이용하는 시간이 더 많아지게 되었다.
앞선 사람이 뒷사람에게 주의할 곳을 가르쳐주고 손을 잡아 이끌어주면서 용케 버티며 나아갔지만, 종국에 30m 절벽 위에 대롱대롱 버티고 선 네마리의 산양들 같은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왜? 길이 없어?"
뒤에서 아내가 묻는다.
"아니... 길은 있는데... 길이 좁아서 아이들에겐 좀 무리일 것 같은데..."
"그럼, 우리 돌아가자."
무길도한량이 지친 표정으로 아내를 돌아본다.
"이곳은 지난다 해도 다음이 또 어떨지 모르잖아?"
"그래. 맞다. 돌아가자."
우리는 다시 또 기어서 미끌어지면서 올라왔던 절벽을 되돌아 내려가기 시작했다.

첫째가 정확하게 아는 길목까지 되돌아온 우리는 다시 첫째에게 리더를 맡기며 지친 몸에 이끌고 도서관 뒷길을 향해 나아갔다.
"여기서 저 언덕만 올라가면 도서관으로 향하는 큰 길이 나와."
돌아가는 즐거움에서인지, 아니면 아는 길을 간다는 편안함에서인지 녀석의 발걸음은 날아가는 듯 했다.

"아, 이녀석아, 좀 천천히 좀 가라. 아빠 엄마 숲속에 버리러 온 헨젤과 그레텔도 아니고, 왜 이렇게 빨리 간단 말이냐?"
지치고 힘 빠진 무길도한량은 맨 뒤에 처져 비오듯 땀을 흘리며 쫓아가기에 정신이 없었다.
녀석은 계속되는 무길도한량의 투덜거림도 아랑곳 없이 속도를 내고...
"저 녀석이 아까 절벽에선 꼼짝 못하더니...에잉."

오붓하리라 예상했던 우리가족의 산책은 협곡에서 두시간 동안 길을 잃고 헤매이는 헤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래도 얻은 것도 있었다.
어려운 시기에 모두 한가지로 마음을 통일하고 같이 노력했다는 것.
누구도 잘못한 사람에게 불평하기 보다는 서로를 격려하며 도와주었다는 것.
힘들었지만 나름 가족애를 느낄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다음에 다시 한번 도전해볼까? ^^
어이크, 사방에서 베개들이 날라온다! ^^

2011년 8월 3일 수요일

미나리 한 펄기를



미나리 한 펄기를 캐여서 싯우이다
년대 아니아 우리님께 바자오이다
맛이아 긴지 아니커니와 다시 십어 보소서


                                    (유희춘)


미나리 한 포기를 캐어서 씻겠습니다
다른 데 아니고 우리 님께 바치겠습니다
맛이 좋지 않더라도 자꾸 씹어보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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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유명한 애처가(愛妻家)였다.
어느 겨울 승지의 직책으로 대궐에서 숙직할 때 모주 한동이가 생기자, 따로 남기어 일필휘지 시 한 수와 함께 아내에게 보낸다.

눈 내리고 바람 불어 더 추워지니
냉방에 앉아 있을 당신 생각이 나는구료
이 술이 변변치는 않은 술이지만
찬 속을 덥히기엔 충분하리이다.

오버. 애처가 올림

그의 아내는 또 당대 둘째 가면 서러워 할 여류시인 송덕봉.
즉시 마른 붓 끝에 침 묻혀 남편에게 답시를 쓴다.

국화잎에 눈발이 날려도
은대에는 따뜻한 방이 있겠지요
추운 집에서 따뜻한 술을 받아
감사한 마음으로 배를 채웠습니다

여기서 '은대'는 승정원을 이야기 한다.

유희춘이 을사사화에 엮이어 19년 동안 함경도 종성에 유배 되었을 때, 그녀는 그를 돕고자 아득한 북쪽 땅으로 그를 찾아가 유배생활을 같이 한다.


行行遂至 摩天領   (행행수지 마천령)
東海無邊 鏡面平   (동해무변 경면평)
萬里婦人 何事到   (만리부인 하사도)
三從意重 一身輕   (삼종의중 일신경)


걷고 또 걸어 마천령에 오르니
끝없는 동해가 거울처럼 평평하다
만리길을 아녀자가 무슨 일로 왔을꼬
삼종의 길은 중하고 일신은 가벼웠을 뿐.

19년 + 보너스 1년...
무슨 프로선수 계약조건도 아닌 것이, 길기도 참 길었다.
그녀 나이 스물 일곱에 고생길은 열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렇게 힘든 생활을 함께 한 아내에 유희춘은 감동, 더더욱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선조임금이 들어서면서 그는 복직, 승진... 다시 정상적인 삶을 살게 된다.
숙직하다 아내에게 쪽지도 살짝 보내면서... ^^

그래서 우리도 이같이 사랑하며 잘 살리라...
하고 교훈적인 끝맺음으로 오늘 이야기를 맺으리라고 예상하시는 분들, 잠깐!

허허... 그 이야기엔 반전도 있지비.
그 시대의 사대부라면 대부분이 그랬듯이, 유희춘은 첩을 두고 두 집 살림을 했다지?
자식도 여럿 낳고 말이지...
하지만 그녀는 그들마저도 잘 보살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네.

하여간 여자의 팔자라는 건, 차암.... ㅉㅉ


(2011.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