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오십부터래...

인생은 오십부터래... ^^

2012년 4월 11일 수요일

라면 한그릇

라면 한그릇




바야흐로 화사한 봄날의 연속이다.
삼일을 연속으로 햇살이 만발했던 것이 얼마만일까?
10월 중에 시작되었던 우기가 이제 끝이 나는 것인가?
하하, 천만의 말씀이다.
이 섣부른 봄빛은 잠시 후의 약 2주간 지속되는, 우기 마무리비가 온 다음에야 진짜 진짜 따사로운 봄볕과 함께 봄의 여왕 5월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또 한 번의 길고 우울한 우기를 짙은 커피향으로 이겨냈음에 자찬이 절로 나온다.

엊그제는 서울에서 울 오마니께서 보내신 위문품이 도착했다.
그게 미국에 오면 이름이 케어 팩키지 (care package) 로 바뀐다.
천만리길 혼자 떨어져 고생하는 며느리를 위한 누룽지, 김자반, 물기를 쥐어 짠 장아치들...
언제나 할머니 곁을 그리워하는 손녀들을 위한 과자들, 비밀리 꼬불친 오달러 짜리 몇 장...
그 틈바구니로 빨간 포장지의 '뽀빠이'가 눈에 띄었다.
별사탕이 더하여졌기에 이름도 삼양 '별뽀빠이'로 변하였지만, 우리 옛날에 아주 가끔씩 군것질 쾌가 있을 때 소중히 까먹던 그 뽀빠이임에 틀림이 없었다.

옛날과는 사뭇 달라진 겉봉을 발견하고 이리저리 뜯어보기 시작한다.
"철분 2.25mg 함유 (호!?)
2012.08.07. (이건 유통기한일 터이고...)
김미숙 02 (아마도 2번 생산라인의 감독책임자일 것이고...)
중량 65g, 열량 290kcal (한끼 밥은 되네?)
...
그리고 또 뒷면도 살펴보다가 발견한 한 문구.
"주머니 속에 쏘옥~ 휴대하기 간편해서 OK!"
하하, 누구 주머니인지 참 크기도 하다. ^^

우리 어렸을 적에도 모처럼 뽀빠이 하나 사면 봉지를 싸악 뜯어서 내용물만 바지주머니에 쏟아넣고 돌아다니면서 찔끔찔끔 꺼내먹는 온종일용 주전부리였다.
"야야, 빨리 접어."
"가만 있어봐. 좀 먹고..."
딱지로 글높 별높 따질 때도, 팔방다마로 쌈치기를 하다가도 주머니에서 한웅큼 꺼내 입에 넣고 으드득 으드득 씹어먹던 것이 뽀빠이였다.

물론 제일 먼저 나온 삼양 베이비라면과자도 있었고, 뽀빠이보다 더 고소하고 면발이 가늘었던 10원짜리 롯데 라면땅, 20원짜리 고급형 롯데 자야도 있었다.
내 개인적으론 라면땅을 선호하였지만 그래도 역시 단위금액 당 양이 월등히 많았던 뽀빠이를 무시할 순 없었다.
아마도 지금까지도 생존해있는 것도 뽀빠이 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라면을 만들다가 남은 부스러기를 이용하여 만들기 시작했다는 라면땅, 라면과자들...
하지만 나에겐 그 라면부스러기 과자가 크나큰 사치일 뿐이었다.
라면을 끓여 먹기도 힘든 살림에 라면을 부숴 만든 과자라니요...

미아리 산꼭대기 단칸방 시절, 지겹도록 먹던 칼국수와 수제비들 사이로 한줄기 광명이 비치던 날은 바로 어머니가 성북동 라면공장으로 일일견학을 다녀오시던 날이었다.
바람만 불어도 덜컥대던 부엌문짝 사이로 꼬래꼬래한 고기국물 냄새가 퍼져나오고 세발 달린 플라스틱 저녁밥상이 문지방 넘기만을 고대하던 누이와 내가 괜히 신이 나서 방바닥을 콩콩거리며 맴돌았던 그 날.
누이의 그릇에 라면이 한가닥이라도 더 들었을까 사정없이 의심의 눈초리를 날리기도 했다.

면발 찌끄러기는 커녕 국물 한방울이라도 남길 수 없어 마지막 방울까지 이미 사라진 그릇을  쪽쪽 빨던 나의 모습에 어머닌 그렁한 눈을 하시고 날 당신의 무릎 위로 안아 올리셨다.
"그렇게 맛있어?"
응, 무지 맛있어.
"그래, 우리 다음에도 또 많이 먹자."
난 고개를 얼른 끄덕이면서도 누이의 턱 끝을 행해 달음질치는 라면국물줄기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하고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저런... 국물 좀 빨리 핥아랏! 턱 밑으로 떨어진다잉~

라면으로 좋은 저녁을 신나게 먹고 나면 저녁하늘 너머 별들은 더 아름다웠다.
어머니와 함께 견학을 다녀온 집들에서 나온 라면냄새로 온동네가 행복 속에 빠진 듯 했다.
겨우내 걸핏하면 싸움박질이던 석이네 집에서도 환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오고...
우린 맑게 빛나는 삼태성을 바라보며 병원에 있는 우리 아가도 생각하며 노래도 불렀다.

날 저무는 하늘엔 별이 삼형제
반짝반짝 정답게 비추이더니
웬일인지 별 하나 보이지 않고
남은 별만 둘이서 눈물 흘린다

그러다보면 누이를 향해 욕심부렸던 것이 미안해지기도 했다.
누나, 라면 참 맛있지?
"그래, 정말 많이 먹고 싶다."
그래, 나도 정말 많이 많이 배 터지도록 먹고 싶다.
그렇게 라면은 내 가슴 속의 양식으로 자리하기 시작했다.
뜨거운 라면을 호호 불며 가닥가닥 세듯 먹던 누나는 지금 하루에 라면 몇 봉지의 수입을 올리고 있을까 생각해본다.

라면이 그저 단순한 보리고개를 극복하기 위한 대체식량의 하나로만 평가되어지던 시절, 청바지에 통기타를 둘러맨 젊은이들이 유행가를 개사해서 불렀던 노래가 하나 있다.
기억컨대 개그맨 고영수가 만들지 않았나 싶은데, 그 당시 많은 싱건지들이 너도 나도 따라 불렀기 때문에 원작자에 대하여는 나의 기억에만 의존할 수 밖에 없겠다.


국수가 파마를 하면은 그때는 라면 (워~워~)
라면이 불어서 파마가 풀리면 그때는 우동
우동에 고춧가루를 넣으면 그때는 짬뽕 (워~워~)
이러는 내 모습 서러워 울면서 먹으면 그때는 울면
내 인생 꼬여서 하루의 한끼는 김치도 없는 라면


나는 지금 한국에서 라면 한봉지가 얼마인지 알지를 못한다.
종류도 워낙 많을 뿐더러(!) 서로 가격 차이도 많이 나서 어디에 기준을 두고 말해야 할 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주로 가는 마켓에서는 어떤 한 일본라면 브랜드를 세일해서 1달러에 6개씩 팔고 있다.
그런데 그 라면이 묘하게도 나의 첫 삼양라면의 국물 맛과 많이 비슷하기에 다른 비싼 (좋은?) 라면들은 제쳐두고 항상 이것만 찾게 되는 것이다.
소금량에 주의코자 국물은 가급적 손대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대부분 경우 그 국물의 맛을 거부할래야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빠져있다.
심각한 중독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십여년 전 일본 동경 뒷골목 시장을 지나다 허름한 문짝 위의 '라멘'이란 글씨를 발견했을 때의 반가움.
동행했던 매제도 라면을 꽤나 좋아하던지라 신나 했지만, 막상 카운터 너머로 라면이 등장하였을 때 우린 그 '원조 라면'에 놀라고 말았다.
파마를 안한 생머리의 라면!
하지만 주방장이 직접 맛낸 국물은 원조라는 말에 걸맞는, 깔끔한 맛의 고깃국물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좋은 맛이었다.


생각난 김에, 서울에 계신 부모님께 영양제 보내드리는 편으로 유명한 일본라면 세가지 맛을 한개씩 박스에 동봉했다.
혹시나 두 분 저녁상에 영 국거리가 마뜩찮으실까봐, 혹시나 옛날 단칸방 시절 모처럼 잡수셨던 라면이 생각나실까봐, 혹시나 맵게 만들기 경쟁에 옛라면들처럼 좀 점잖은 맛에 대한 그리움이 있으실까봐, 또 혹시나 두분이 다투시기라도 해서 서먹서먹하실 때 서로 라면 한 젓가락씩 나눠 잡수시라고...
옛날 코메디언 구봉서씨와 곽규석씨 처럼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고 말이지. ^^

4월하고도 중순에 들어선 아직까지 공기 중엔 제법 차디찬 기운들이 섞여 있다.
이럴 때 일수록 뜨-끈한 라면 한사발이 간절한 것은 과거의 아픈 상처의 아련함 때문인지 아니면 죽도록 라면을 사랑하는 어느 오타쿠의 열정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아니면 산이 그곳에 있어 올랐듯이 라면이 거기 있기에 먹는 것일까?

오늘도 1달러 어치의 라면을 쇼핑카트에 담으며 나는 마냥 행복한 생각에 빠져든다.
하루에 하나씩 6일을 먹을까?
아니, 하나씩 5일 먹고 마지막날에 곱배기로?
당근과 파를 썰고 계란을 풀고 고춧가루를 뿌리고 식초를 한두방울 넣어줄까?
아니지, 역시 오리지널 국물맛을 즐기려면 아무것도 첨가하지 말아야...
...

즐거운 상상으로 입끝이 씰룩씰룩하다 절로 벌어지는 헤벌죽한 웃음 끝에 계산대에 떡 하니 버티고 서있는 헤비급 점원과 눈이 마주친다.
가만 바라보다가 보니 괜히 괘씸한 생각이 들어 버럭 짜증을 낸다.
아니, 왜 1달러에 일곱개면 일곱개지, 여섯개냐고?
"What did you say?"
녀석이 한걸음 내딛으며 눈꼬리를 치켜 올린다.
아니, 뭐...You have a good price 라고...
그래도 하루에 한개씩 일곱개 맞춰주면 좋을텐데...쩝.



(2012.04.11)

댓글 2개:

  1. You have a talent to recall the heart breaking memory as a beautiful, inspiring movie-like story. so detail. How can you do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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