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오십부터래...

인생은 오십부터래... ^^

2011년 7월 24일 일요일

오래된 편지 한 장



오래된 편지 한 장








이사를 자주 하다보면 뽀빠이처럼 양팔뚝에 두툼한 알통이나 람보처럼 가슴에 제각기 씰룩거릴 수 있는 갑빠가 생길까?
알통이나 갑빠는 커녕, 실상 꾀만 자꾸 늘어가는 것 같다.

가령 이사할 때마다 꾸렸다가 이사 후 풀지 않는 박스들의 숫자는 자꾸 늘어나고, 아기자기한 추억의 소품들이 가득해야 할 장식장은 텅빈 채로 남는다든지 하는 식이다.
찬장에 가득하던 그릇들은 가장 단촐한 라인업으로만 구성되게 되고, 옷장에 가지런하던 옷들도 점점 숫자가 주는 대신, '겨울옷' 이니 '유리그릇' 이니 하고 붉은 매직펜으로 쓰인 박스들의 숫자는 반대로 자꾸 느는 것이다.
아이들의 장난감이니 노트들도 'ㅇㅇ타임캡슐' 이라는 이름 하에 박스에 테잎질하여 창고로 넣고, 옆구리엔 큼지막한 글씨로 'ㅇㅇ 결혼 후에 열어볼것' 이라고 덤으로 써놓았다.

이런 저런 정리를 하다보면 또 반드시 만나는 것은, 이젠 가장자리도 조금씩 더덜거리고 페이지 마다 가지런하게 정리되었던 사진들은 우리의 기억들처럼 마구 헝클어진 상태로 남겨진, 오래된 사진첩들이다.
누렇게 빛 바랜 사진들은, 어둠 속에서 탈탈거리며 돌아가던 릴프로젝터처럼 저 먼 기억의 저편으로 먼지 많은 실타래를 풀어내주고, 우린 회칠한 벽에 덩그라니 매달린 백열등의 뿌연 빛 사이로우리들의 희미한 모습들을 떠올리게 된다.
때론 훈훈한 미소가, 또 때론 마음 적시는 아픔이, 또 때론 가슴 저 밑까지 저려오는 그리움이 거기에 있다.

어? 여기에 이런게 있었네...
마땅히 있을거라고 생각한, 심각한 표정을 한 백일사진이나 돐사진은 찾지 못한 대신, 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기억의 단초를 찾아낸다.
아주 오래된 편지지에 나름대로 폼을 잡느라 누군가의 볼펜을 빌려쓴, 나의 편지였다.
얼마만큼이나 오래되었을까...

할아버진 중풍으로 쓰러지신 후 반신불수가 되어 계셨고, 내가 국민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정월에 돌아가셨으니까, 8월에 쓴 이 편지는 6살이나 7살쯤 일텐데...
10월에 태어난 막내가 홍역을 앓는다는 것을 보면아마도 그 이듬해일 것이고, 막내와 내가 6살 차이가 나니까 7살 때가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해병대에 입대한 큰삼촌이 베트남전선에 자원하여 간 것도 그 때쯤이 틀림없고...
40년이 지난 편지는 그 당시 우리집의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다.

아버지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빠 대신 할아버지를 돌봐드려야 한다. 할머니 말씀도 잘 듣고..."
아버지의 정치활동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시작한 미아리 달동네생활로부터 날 조금이라도 면케 하고자 하심이었을까, 아니면 시골의 부족한 일손 때문에 진짜 할아버지의 시중들 손이 필요했었을까...?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는 손수 진흙과 짚을 섞어 만든 블록으로 벽을 쌓고 짚을 얹어 이 초가집을 만드셨고 여기에서 내가 태어났다.

회색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즐겨 쓰시던 할아버지와 손잡고 광천포구에 소금배들을 보고 오는 길엔 중국사람이 하는 과자점에서 공갈빵을 하나씩 사들고 오던 생각이 났다.
커다란 허풍선 밀가루빵 속에 살짝 발라진 흑설탕이 끈적하게 기억에 녹아났다.

누워계신 요 밑으로 방바닥이 잘잘 끓고 있었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아무 말씀도 없이 허공에서 눈을 움직이시던 할아버지의 눈가에 눈물 한 방울이 고였다가 뺨을 타고 흘러 베개로 떨어졌다.
"할아버지..."
"어...어...어..."
소리는 아무 의미 없는 신음으로만 이어졌고 할아버지의 눈물은 자꾸만 흘러내렸다.
나도 몰래 흐르던 눈물을 깨닫고 소매끝으로 쓰윽 닦으며 이불 속으로 손을 넣어 할아버지의 손을 꼬옥 잡아드렸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매일을 할아버지 옆에 앉아 지냈다.
바쁜 농장일로 모든 식구가 동원되었기 때문에 할아버지를 돌볼 사람도, 나와 함께 놀아줄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의 가래가 끓어오르면 얼굴 곁으로 깡통을 들이대어 가래를 받고, 눈짓으로 소변을 말씀하시면 이불을 젖히고 소변깡통을 들이대고 소변을 받아냈다.
일 처리 후엔 재빨리 깡통을 들고 밖으로 나가 사과나무밭 고랑이 시작되는 곳으로 쏟아버렸다.
그리곤 또 돌아와 할아버지 옆에서 라디오에서 배운 나훈아네, 오기택이네, 김상진이네 하는 가수들의 노래를 부르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러다가 나는 언제쯤 다시 서울로 돌아왔을까?
희미한 기억의 시계는 거기서 멈추어선다.
국민학교1학년 이었다면 개학에 맞춰 돌아오지 않았을까...?

편지의 뒷면에는 아버지와 나와 막내동생이 손 잡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어머니와 누나와 바로 밑의 동생이 그려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 당시 난 여자를 어떻게 그려야 할지 모르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막내의 성별을 아직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름대로 이건 남자끼리의 비지네스 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당시 나의 생각엔 '남자' 라는 관념이 꽤 강해서, 국민학교 입학식 때 국기에 대한 경례를 당당하게 거수경례를 한 무길도한량 이었다.

오래된 사진첩엔 나의 세발자전거 시절의 흑백사진도 있고, 예전엔 눈여겨 보지 않았었던 국민학교 시절 사진들도 제법 들어있었다.
헤... 이 친구 사진이 여깄네...?
잊혀진 친구들, 기억할 수 없는 시간들이 하나씩 둘씩 살아 돌아왔다.
단편적으로라도...

그럼, 내 인생 초반 10년의 나머지 흔적들은 어디에...?
기록의 부실함에 아쉬움도 함께 다가왔다.
물론 사진이 흔치 않던 시절이었던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그나마 있는 것도 제대로 보존을 안한 것도 큰 이유가 될 수 있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는 좀더 많은 타임캡슐 박스를 만들어 주어야겠다.
그러기 위해선 이사를더 자주 하면서 더 많은 박스를 꾸려야 할까? ^^



PS> 할아버진 돌아가신 후 10년쯤 되었을 때 날 한 번 찾아오셨다.
어느날 밤, 심한 갈증으로 잠을 깬 나는 아래층에 있는 부엌으로 물을 마시러 내려간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신 후, 다시 2층으로 가고자 막 돌아서자,
그곳에 할아버지가 허연 모습으로 서계셨다.
순간, 난 너무 놀라 바로 돌아서버렸고... 시간이 지나면서 무척이나 그 순간을 후회했다.
할아버지가 날 찾아오셨는데, 내가 왜 그랬을까 하고...
그 후로 다신 내게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201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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