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오십부터래...

인생은 오십부터래... ^^

2011년 7월 24일 일요일

가벼운 양식

가벼운 양식






           
정동 MBC에서 덕수궁쪽으로 돌아나가는 그 언저리엔 오래된 경양식집이 있었다.
이름하여 '이따리아노' 라 하여, 국적 불분명한 경양식집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던 당시에 이탈리안 스타일의 경양식이라고 꼭 꼬집어 표방한 레스토랑이었다.
실내 장식이나 웨이츄레스들의 복장에선 이탈리아의 향기가 났었던 듯 하지만, 그렇다고 메뉴 자체가 100% 이탈리안식은 아니었던... 하지만 그 분위기와 맛이 상당히 괜찮아서 각종 행사치레 하는 사람들이 잘 찾는, 그런 곳이 있었다.
야채스프와 따뜻한 모닝빵이 인상 깊었었다.

또,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나와 대한문을 지나고 다시 반대편 돌담길로 들어서면 막다른 길 끝으로 영국대사관이 보이는 골목 안으로 세실극장이 있었고, 그 아래에 '세실레스토랑' 이 있었다.
이곳은 한때 재야 인사들이 모여 독재에 항거하는 시국선언을 하기도 하고, 기자회견도 갖고 하던 곳으로 TV 뉴스에 자주 나오던, 그런 쪽으로 유명한 경양식집이었다.
젊은 날에 드나들 때에도 항상 뒷통수로 쏟아지는 감시의 눈길을 느끼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론 아내와 선 본 날 점심식사를 하러 가 스파게티와 세실정식을 먹었던 곳이기도 했다.
가격 대비 내용이 충실한 편이었고...

영등포 역전엔 신세계백화점 맞은편으로 제법 큰 '해바라기' 라는 경양식집이 있었는데, 이곳의 특색은 대부분의 경양식집이 소규모라 음악을 주로 카운터에 있는 오디오를 통해 틀어주었던 것과는 달리, 중앙에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무대가 있어서 30분 마다 생생한 연주를 들을 수 있는 점이 좋았던 곳이었다.
생음악에 감동 먹은 무길도한량이 촌스럽게도 쪽지에 신청곡을 써서 피아니스트에게 건네주려다, 옆에서 지키고 있던 험상궂은 덩치에 의해 눈흘김을 당해 쫓겨날 뻔 했던 곳이었는데 실내장식에 전혀 신경쓰지 않은 듯한 개방성이 특징이었고, 거리에선 볼 수 없었던 초미니스커트의 웨이츄레스들이 실내장식을 대신하던 곳.
가장 싼 돈까스정식은 혼자 먹기엔 벅찰 정도로 풍족한 모습이었다.

보신각 뒷쪽으로는 꽤 많은 경양식집들이 빌딩 지하마다 위치하고 있었는데, 수 많은 대학가 미팅들이 그곳에서 이루어지고 또 수 많은 젊은이들의 영혼들이 깨어져나간 역사적인 지역으로 '반줄', '일과 이분의 일', '오감도' 등등의 경양식들이 유명했다.
가수 현인, 가수 전영의 탱고 '서울야곡' 의 가사에서도 이러한 분위기를 상상할 수 있는 대목이 있는데, 2절에 보면 "보신각 골목길을 돌아서 나올 때엔 찢어버린 편지에는 한숨이 흘렀다..." 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대부분의 이곳 경양식집들은 맛 보다는 만남의 장소로서의 분위기 창출에 충실했던 면이 있었다.
노래 이야기가 나왔으니 노래를 안듣고 그냥 갈 수는 없겠다.
http://www.youtube.com/watch?v=2G8j1gN6JQU (클릭!)

지금이야 곳곳에 서양식 고급 레스토랑들이 사방에 있지만, 당시만 해도 양식집이란게 그리 많지 않아서 '너, 또랑에 가서 썰어봤어?' 하는 질문을 할 정도로 낯선 곳 중의 하나였고, 레스토랑들도 정통을 표방하기엔 좀 미안했던지 '가벼운' 이란 표현을 붙여 경양식이라고 부르던 것이 현실이었다.
중요한 만남을 갖는데, 어디 가서 방바닥에 퍼질러 앉아 삼겹살 구워 쌈 싸먹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국밥 한 그릇씩 놓고 마주 앉거나 입 가장자리에 진한 짜장 묻혀가면서 이야기 하기도 그런 경우들에는 경양식집이 신발 안 벗고 간편히 의자에 앉아 폼 잡으며 먹기에 제 격이라서 그런지 제법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갔다.
그래도 고기가 들어가서 그런지 여전히 가격은 높아, 제법 용돈을 많이 받던 무길도한량도 맘 먹고 한 번 가서 칼질하고 오면 일주일 내내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어야만 했다.
그때만 해도 그런 음식들은 그곳에서만 맛볼 수 있었던 걸 어찌하랴...

그곳의 음식이 어쨌었길래...?
아, 그거야 경양식집에 가서 한 번 썰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도 못하는 식도락이 있지 않았겠남?
우선, 거기에서 주로 파는 메뉴를 주욱 한 번 나열해보자면,
쉽게 먹을 수 있는 오므라이스, 카레라이스, 하이라이스 그리고 스파게티가 있었고, 칼질하는 종류로는 돈까스, 함박스텍, 비후스텍, 비후까스 그리고 정식 등이 있었고, 안주론 멕시칸샐러드, 과일샐러드 등등...
아아, 이야기를 하다보니 그 맛이 심히 그리우나 풀 길이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

대부분의 경양식집들은 빌딩 지하나 2층에 자리를 하고 있었는데, 일단 문을 열고 들어가면 좀 어두침침한 분위기에서 테이블마다 개별 조명이 있고 여기저기 칸막이가 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폐쇄적인 구조가 당시엔 터부처럼 느껴지던 여자들의 흡연인구 증가에도 지대한 공을 세우지 않았나 싶다.
조용한 음악은 흐르고 여기저기에서 간간히 들려오는 포크와 나이프 부딪히는 소리, 나즈막하게 도란도란 들려오는 이야기 소리...

검은 바지에 하얀 와이셔츠를 단정히 입고 나비넥타이를 맨 웨이터는 통가죽으로 커버를 씌운 메뉴판과 따뜻한 보리차를 유리잔에 담아 내어온다.
무엇을 먹어볼까나...
서너 테이블 건너에 앉은 여자가 후우 하며 테이블 위로 드리워진 백열전등을 향해 담배연기를 뿜어올린다.

이 집의 음식을 골고루 먹어보기 위해서는 정식을 시키는 것이 좋다.
정식엔 돈까스와 생선까스와 함박스텍이 조금씩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정식하고 OB 라거 하나 주세요.
스프는 야채스프 하고 크림스프가 있습니다.
크림스프로 주시고요.
밥으로 하시겠어요? 빵으로 하시겠어요?
...잠시 고민을 하다가 그냥 밥으로 주세요 한다.
네, 잠시 후에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웨이터는 빼앗듯 메뉴판을 거둬가며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우리 식구가 처음 경양식집으로 고기를 썰러 갔던 날,
처음 먹어본 크림스프의 맛은 천상의 음식처럼 우리의 뇌 속으로 파고 들었다.
언제나 아껴먹기를 좋아하고, 항상 좋아하는 것을 가장 나중에 먹는 막내 동생은 한 입 먹은 크림스프가 너무도 맛이 있어서 그것을 제일 나중에 먹고자 남겨두었다.
웨이터가 메인코스 음식를 가지고 와 배열하면서 스프그릇과 숟가락들을 거둬 가버리자 막내 동생은 빼앗긴 자신의 몫이 안타까워 울어버렸다.
한그릇쯤 다시 줄 수도 있었을텐데, 비정한 웨이터는 남은 스프가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스프는 원 없이 먹을 수 있는 이국땅에서 살고 있는 막내 동생이 지금도 그 크림스프를 그리워하는지 모르겠다.

웨이터는 나이프와 포크와 숟가락을 차례로 배열하고 샐러드접시와 크림스프와 맥주를 내려놓았다.
고깃부스러기가 점점이 박힌 누리끼한 크림스프의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하지만 얄팍한 접시 위에 살짝 깔려 나온 스프의 양은 한 네 스푼이나 될까?
좀 넉넉한 마음으로 주었으면 좋았을걸...
올리버 트위스트도 아니고 스프를 더 달라 그럴 수도 없고...쯧.
야채샐러드 위엔 케챺과 마요네즈를 적당히 꿀과 함께 섞은 소스가 올려져 있어 포크로 두어번 저어 떠먹으면 그 맛도 제법 괜찮았다.
맥주로 시원하게 입가심을 하니 벌써 배 저 밑에서 빨리 음식 들여보내라고 신호를 보낸다.

정식 접시는 제법 큼지막한 것이 보기에 기분이 좋았다.
바삭하게 튀겨낸 얇은 돈까스가 왼편에, 역시 마찬가지로 잘 튀겨낸 생선까스가 중앙에,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함박스텍 조각이 두어개 양송이버섯을 이고 제일 오른쪽으로 자리헀다.
접시 윗켠으론 삶은 당근 두어쪽, 삶은 완두콩과 옥수수알이 약간씩 그리고 마카로니가 서너쪽 차례대로 담겨있다.
같이 나온 밥 접시엔 하얀 쌀밥이 아까의 크림스프 마냥 납작하게 깔려있고 간간히 밥 위에 까만 깨를 몇 뿌려놓았다.
깔끔하게 자른 노란 단무지 몇 조각도 작은 접시에 별도로 담겨 나왔다.

먼저 정식 접시에 얹혀나온 가니쉬 위에 토마토케챺을 뿌려주시고...
아삭하는 소리를 내는 돈까스의 왼쪽을 포크로 잡고 칼로 오른쪽 부분을 먹을 만큼 잘라낼 때 돈까스는 감동의 소리를 내며 빵가루를 떨구었다.
데미그라스 소스도 딱 필요한 양만큼만 뿌려져 있었다.
돈까스를 받아들이는 입 속은 더더욱 가관으로 완전 흥분의 도가니다.
Give me more, Give me more...
한조각을 더 잘라내어 먹을 때쯤엔 나의 입의 양옆은 위로 약 10도 가량 올라갔으리라.
시원한 맥주를 한모금 하며 입가심을 한다.

다음은 생선까스의 차례이다.
난형난제...
잘 튀겨낸 생선까스를 먹어보기 전에 돈까스의 맛있음을 논하지 말라!
고, 지금쯤 주방장은 숨어서 나의 모습을 훔쳐보며 쾌재를 부르고 있지 않을까 싶다.
생선까스 위를 가로지르며 얹혀져 있는 타르타르소스가 고소함을 더했다.
또 한 번 감동하는 나는 맥주컵을 들어 안보이는 주방장을 위하여 건배를 보낸다.
나의 간 주변에 생기는 지방덩어리를 지금 이 순간엔 생각하지 말기로 하면서...

돈까스와 생선까스를 끝낼 즈음엔 이미 나의 만족도는 100% 가까이로 올라가고 있다.
정식을 안시키고 함박스텍을 시켰으면 소모양의 나무판 위에 철판이 얹혀있는 함박스텍 전용용기에 담겨 나왔을까?
소스와 함께 자글자글 끓는 함박스텍 위에 어떤 집에서는 치즈 한조각을 올려주기도 하고 어떤 집에서는 달걀반숙도 올려주기도 하는데...
따뜻한 모닝롤을 안시키고 밥을 선택한 이유는 바로 함박스텍과 함께 먹기 위함이었다.
돈까스와 치킨까스가 비워준 자리에 밥을 솔솔 옮겨놓고 (누구 안보지? ^^) 함박스텍 소스에 밥을 비벼가면서... 나이프도 필요없다.
부드럽게 잘 익은 함박스텍은 포크 옆구리로 살짝만 눌러줘도 알아서 잘 잘라지니까...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질풍노도와 같이 함박스텍을 즐겨주시고 나면 기다리고 있던 맥주의 마지막 잔으로 소화를 시켜준다.
때 맞춰 나오는 디저트로 커피를 받아들면, 삼천원짜리 정식이 어찌 그리 푸짐하게 느껴지는지... ^^
경양식집 특유의 쓰디쓴 원두커피에 과감하게 프림 둘, 설탕 둘 넣고 휘휘 저어주면 그 향에 취해 저절로 담배 한 대를 당겨 물게 되어있다.
나도 서너 자리 건너편의 여자처럼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모금을 식탁 위 스테인드글라스 조명 속으로 푸우 뿜어보낸다.
먹는 것은 좋은 것이여...

그나저나 일주일치 용돈이 날라갔으니 내일부턴 도시락 싸갖고 다녀야겠군.
교통비나 제대로 남았는지 몰라...?
하루종일 방 구석에 콱 처박혀 지내면 오마니가 돈 떨어진 거 눈치채시고 지원해주지 않으실까?
이런 주말에 미팅건수 들어오면 골치 아픈데...
확실히 경양식은 내 형편에 좀 무리지? --;;
그래도 잘 먹고나니 졸음까지 밀려오니까 기분은 좋구먼... ^^

데모가 시작되었는지 함성소리와 함께 최류탄 터지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휴교령이라도 떨어질라나...?



















(2011.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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