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오십부터래...

인생은 오십부터래... ^^

2011년 7월 23일 토요일

살며, 같이 먹으며



살며, 같이 먹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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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하고 노래 부르면, 그눔의 쌀밥이나 한 번 배터지게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던 시절이 있었다.
아마 지금 이북의 동포들이 그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을게다.
먹는 것이 이처럼 고통이던 때도 있고 요즈음처럼 산해진미가 지천으로 널려있어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까 하는 고민 아닌 고민을 하는 때도 있다.

살며 먹으며 생긴 일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밥 먹다가 성깔부리고 멀쩡한 밥상 뒤집어 엎어 어린아이 빈 숟갈만 빨게 만든 일이라든지, 두 사람이 물 말은 밥을 먹다가 한사람이 푸하하하 뿜는 바람에 마주 앉은 사람 얼굴 하얀 밥알들이 서릿발 마냥 꽂히던 일하며...
하지만 오늘 이야기는 그렇게 아주 웃기지는 않다.
그냥 듣고 한 번 피식- 하고 웃어버리면 좋을, 김 빠진 맥주 같은 이야기이다.

두어번 만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데이트장소는 좀더 실용적인 곳으로 바뀌었다.
말하자면, 폼나게 음악흐르고 '안녀하세요, 안녀하세요' 하는 DJ 가 억지춘향으로 분위기 잡는, 노량진 역전의 레스토랑 같은 곳이 아니고, 뭔가 조금은 더 맛이 있을 것 같이 들리는 원조평양냉면집 같은 곳으로 말이다.

K양, 오늘은 죄끔 더운데 시원한 냉면이라도 한사발 하실까?
하며 남정네 U는 작은 눈 위로 눈썹을 들었다 놨다 하며 물었을 것이다.
그거 참 좋은 생각이네요.
별로 싫지 않은 기색으로 K양은 그렇게 쉽게 동조를 해주었을 것이고 남정네 U는 의기양양하게 원조평양냉면집의 플라스틱 주렴을 헤치며 안으로 들어갔겠지.

물냉면은, 시원한 육수 위로 솟아오른 냉면발 꼭대기에 넓적한 쇠고기 두어 점이 오이채를 곁에 끼고 앉았을테고 그 옆으로다 삶은 계란 반쪽이 자리해야, 이게 완벽함을 이룬 것이렸다.
아, 근데 이 삶은 계란 반쪽에서 문제가 생겼다.
K양은 언제나 가장 맛있는 것을 가장 나중에 먹는 성격, 반면에 남정네 U는 가장 맛있는 것을 가장 먼저 먹는 성격.

남정네 U는 우선 자신의 냉면에 얹힌 삶은 계란 반쪽을 입으로 덥석 넣어준 뒤 젓가락으로 냉면을 휘휘 저어주기 시작한다.
K양은 그래도 아직은 이 남정네 앞에 얌전을 빼느라 냉면을 살살 저으며 한가닥 두가닥씩 면발을 끌어올리기 시작한다.
얼음이 살짝 뜬 육수물을 한 번 쭈욱 들이키며, 어--- 시원타 하는 눈빛을 서로 마주치지만 두사람은 원래 약간 말이 좀 적은터라 그냥 계속 먹기로 한다.

게임이 거진 종반으로 치닫을 무렵, 남정네 U는 K양의 젓가락질이 잦아드는 틈을 이용하여 상산 조자룡의 호쾌한 장창술 같은 솜씨로 K양 냉면그릇으로부터 삶은 계란 반쪽을 집어낸다.
아효! 아웅- 쩝!
???
순식간에 계란을 강탈당한 K양은 어리둥절 하다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자신 앞에 벌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으흑-
삶은 계란을 너무도 좋아하는 K양이지만, 본래 남정네 U가 악한 사람은 아니었으므로 그녀는 미래를 위하여 작은 계란 반쪽쯤은 양보하기로 하는 것이다.

무심한 세월은 덧없이 흘러만 가고...
하지만 15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에도 그의 계란 빼앗기는 매번 어김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어느날, 이젠 더 이상 이 서러움을 참지 않겠다고 작정한 그녀는 작심을 하고 그에게 묻는다.
왜 맨날 내 냉면 속의 계란 반쪽을 가져가는거죠? 나도 먹고 싶다고요! (엉엉)
어? 안좋아해서 안먹는 줄 알았는데...? 냉면 다 먹도록 안먹고 남기더구만...?
나는 맛있는거 아껴놨다가 제일 나중에 먹는다고요! (엉엉)
그럼 진작에 말을 하지잉~ 난 그냥 버릴까봐 열심히 먹어주었구만... ^^

15년이란 세월 동안 아무 말 없이 남의 계란을 번번히 먹어댔던 사람도, 또 15년이란 세월 동안 삶은 계란 반쪽을 번번히 빼앗기며 아무 말 없이 살아온 사람도... 
참, 엥카요, 잉~ ^^

하지만 K양은 서러워 할 것이 없다.
무덤덤하고 무의식적인 복수는 의외의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남정네 U는 U서방이 되었다.
상도동 K양의 친정에선 별다른 일이 없으면 매주일마다 온식구들이 모여 점심을 함께 하곤 했는데, 어머닌 U서방이 잡채를 좋아한다고 그의 앞에 항상 잡채 접시를 놔주시곤 했다.
잡채가 빠지는 날이면 어머닌 마치 큰일이 난 것처럼 걱정이 대단하셨다.
얘얘, 그사람 잡채 밖에 모르는 사람인데, 그게 없으면 어떻하니...?
그의 첫 젓가락이 향하는 곳도 항상 잡채 접시 뿐이었다.

고기잡채, 야채잡채, 떡잡채...
아마도 상도동에서 당면을 가장 많이 소비한 집이 K양의 친정집 아니었을까?
그리고 U서방의 변치 않는 잡채사랑은 모든 사람의 놀라움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였음이 세월이 흐르며 밝혀진다.
U서방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제가 처음 상도동에서 식사를 한 날, 잡채 접시가 제일 가까이 있었죠.
사실 잡채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아서 멀리 있는 다른 반찬들을 먹고 싶었지만, 팔을 뻗어 집기도 뭐하지 않았겠어요?
처음 온 날인데 저도 체면을 차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할 수 없이 가까이 있는 잡채만 먹었죠.
그랬더니 어머니께서, 오, U서방은 잡채를 무척 좋아하는구나? 하시데요.
그 다음부터 매주 제 밥그릇 앞엔 잡채만이 놓였죠, 15년 동안 쭈욱- 말이죠...
저도 갈비도 좋아하고 조기도 좋아한다고요. --;;

K양과 U서방이 결혼한지 벌써 17년인지, 18년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나, 그들은 아직도 주일마다 손을 잡고 상도동으로 향한다.
아직도 그의 밥그릇 앞에 잡채가 놓이는지, 아직도 그가 그녀의 냉면그릇에서 삶은 계란 반쪽을 집어먹는지 내 지금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내게 정확히 꽂혀오는 필~~로 보아선, 그들은 그렇게 무디고 미련하게 오래오래 세상을 뚝배기 마냥 살아갈 것이다.
그저 서로가 최고라고 생각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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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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