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오십부터래...

인생은 오십부터래... ^^

2011년 7월 23일 토요일

바람 맞아 좋은 날



바람 맞아 좋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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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바람을 맞았다. ^^

매주 목요일 아침마다 W를 만나 한 두 시간을 함께 커피를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해오곤 했는데, 오늘은 그만 바람을 맞고 말았다.
영락없는 독일병정 W 인지라 약속을 잊을 리가 없을텐데... 하면서도,10분 일찍 도착한 시간을 포함해서 정확히 40분이란 시간을 허공에 띄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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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을 보며 기다릴까 하다가 손끝에 묻을 잉크가 싫어서 옆으로 치우고 만다.
전화라도 해볼까 하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도 괜히 설레발을 떠는 것 같아 그만두기로 한다.
난 차라리 30분 동안 실내 가득 피어나는 스타벅스의 커피향을 맡으며, 이런저런 사람들을 구경하며,아무것에도 신경쓰지 않는 빈 머리로 이 시간을 즐겨보기로 한다.
앉은 나무의자가 딱딱하게 나의 뒤를 눌렀지만 그 정도는 참아주기로 한다.

아마도 그는 오지 않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는 결코 늦을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와의 미팅보다 더 급한 일이, 아니면 더 중요한 일이 생겼을 수도 있다.
아니면 노인네 체력이 떨어져 오늘 아침 달콤한 잠 속으로 아주 조금만 더 녹아들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 까맣게 잊어버리고 뭔가 다른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지도, 혹은 여유롭게 바닷가를 걷고 있을지도모른다.
단지 건강으로 인한 비상사태가 아니기만을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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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유리창 밖으로 시린 하늘이 있다.
달음질치는 조각구름 밑으로 몇 남지 않은 잎새를 흔드는 여린 나무들이 우두커니 섰다.
유리창 맞은 켠에 앉은 턱수염은 랩탑을 꺼내놓고 열심히 무엇인가를 타이핑하고 있다.
그는 아마도 시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 조그만 동네의 지역신문에 기고하는 컬럼니스트일 수도 있겠다.
독수리타법으로 두어줄 정도를 컴퓨터에 입력하곤 커피를 한모금 들이키고 나선 팔짱을 낀채 스크린을 들여다보며 중얼중얼대는데, 테이블 밑으론 심하게 떨고 있는두 다리가 앙상하다.

9시 방향엔 두 젊은 여자가 마주보고 앉아 찔끔찔끔 커피를 마시며 각자의 가족에 대해, 사무실에서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11시 방향엔 두 여자애를 데리고 들어온 동양여자가 좀 톤이 높은 소리로 핸드폰에 대고 잘 되지 않는 영어로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아기팬더곰처럼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여자아이들에 9시 방향의 두 여자들은 시선을 빼앗기고 귀엽다는 감탄사를 터뜨린다.

2시 방향엔 카운터에서 방금 내게 모카를 만들어준 바리스타가 웃으며 다음 오더를 기다리고 있다.
W 가 왔다면 지금쯤 그녀는 Pumpkin Spice Latte 를 만들고 있을 것이다.
해외토픽에 화려하게(?) 등장했던 이웃 동네의 topless 바리스타들과는 달리, 그녀는 금발의 긴 머리를 뒤로 질끈 동여매고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친절하게 손님들에게 커피를 만들어 준다.
여하간, 굳이 또 그곳을 찾아와서 그녀들을 카메라에 담아 인터넷에 올린 한국사람들에게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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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W를 만나면 나는 세가지에 대해 감사하리라 마음 먹는다.
첫째는 복잡한 일상사 중에 머리를 비울 시간을 내준데에 대해서,
둘째는 이곳의 큰 창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가을하늘을 볼 수 있게 해준데 대해서,
셋째는 커피향과 어우러지는 여유로움을 만끽할 기회를 준데 대해서...
노인네가 혹시 이런 나의 마음을 미리 읽고 바람 맞히기로 작정한 건 아니었을까? ^^

내가 바람 맞혔던 이들을 생각해본다.
나의 불찰이 그들의 시간을 소비하였고, 열정을 식게 하였고, 또 마음을 상하게 하였으리라.
더더욱 나쁜 것은 내가 저지른 소행들을 이젠 기억도 다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미안합니다.
멀리서 누구인지도 기억하지도 못하는, 하지만 나로 인해 아팠던 이들에게 고개를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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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차창 밖으로 희미한 낮달이 떴다.
오늘 저녁엔 달의 향기가 짙어 겨울목에 이르지 않을까 싶다.
바람 맞은 하루가 내 그림자 마냥 길게 다리를 끌고 있다.
멀리서 삽짝문 끄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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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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