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오십부터래...

인생은 오십부터래... ^^

2011년 7월 24일 일요일

달려라, 토끼!



달려라, 토끼!






적어도 중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진, 그는 항상 달리기에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남들이 상품을 받기 위해 죽을똥 살똥 달려대는 운동회에서는 선생님들의 자질구레한 심부름꺼리를 찾아 본부석 주변을 얼쩡거리거나 각 종목 결승점 근처에서 물주전자를 들고 배회하기 일쑤였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이 자발적인 심부름꾼이 근처에서 어물쩡거리며 대기하고 있으면 좋아했다.

"어? 너 왜 여깄어? 너도 빨리 가서 뛰어!"
그러다가 눈치 하나도 없는 담임선생님에게 재수없이 들키면, 그는 그제서야 자신의 친구들이 뜀박질 준비하고 있는 쪽으로 어슬렁 어슬렁 걸어갔다.
운동모자를 뒤로 돌려쓴 놈, 무슨 육상선수나 되는 양 구부린 다리를 가슴 높이로 들었다 내렸다 하는 놈, 양손을 허리에 올린 채 이쪽 저쪽 발목을 돌려보는 놈, 혼자서 준비 땅 하며 출발연습을 하는 놈 등등의 아이들 틈 사이로 자신이 뛰어야 할 100미터코스가 내다보였다.

저쯤이 좋겠군...
그는 말없이 혼자 빙긋이 웃으며 직선코스에서 곡선코스로 이어지는 부분을 주시했다.
약30미터 거리쯤 될까?
운동모자 위로 10월의 햇살이 따갑게 느껴지면서 귀 옆으로 땀이 한방울 흘러내렸다.

준비!...땅!
귀가 먹먹해질 만큼이나 큰 총소리에 혼비백산하며 그는 쫓기듯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출발과 동시에 벌써 많은 친구들이 그보다 두어 걸음 앞서 나가 있었다.
10미터...
20미터...
마지막 남은 두세명 마저도그를 추월하게 되면서,이제 마악 그가 꼴찌로 떨어지는 즈음이었다.
30미터 통과.

앗!
그의 두 발이 꼬이면서 그는 곡선코스가 시작되는 그곳에서 중심을 잃고 나뒹굴고 말았다.
코스를 따라 주욱 늘어선 학부형들이 파란 하늘과 함께 빙글 돌아갔다.
안타까운듯 흘러나오는 탄성. 
동정으로 혀 차는 소리.
맨땅에 넘어지느라 무릎이 긇히고 아팠지만 그는 천천히 다시 일어나 입을 악물고 절룩거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이미 다른 친구들은 모두 골인하여 벌써 한산해진 결승점을 그는 천천히많은 사람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여유있게 꼴찌로 골인했다.
선생님들과 친구들로 부터 쏟아지는 걱정어린 격려와 위로...
작전 성공. ^^
어차피 꼴찌로 창피를 당할바엔 감동의 꼴찌를 하는 것이 그 시대 운동회엔 어울리는 것이었다.
어쩌면그는 순진하고 천진난만한 이 초등학교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사악한 마음을 가진 앙팡테리블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그런 식이었다.
몇 년 동안 한번도 전력질주를 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그는 달리기를 꺼려했다.
달리면 뭐해?
또, 달려서 지면 창피하잖아?
그런 그의 마음에 발동을 걸어준 이는 중학교 담임선생님이었다.

체육시간에 편을 갈라 축구를 하고 있던 그에게, 체육담당이었던 담임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다리 근육을 보니, 조금만 열심히 뛰면 차범근 보다도 빠르겠는걸?"
???
"한번 있는 힘을 다해 뛰어보지 않을래?"
하기 싫어하는 그를 10명의 아이들과 나란히 세웠다.
"딱 한 번만 해보는 거다."

결국 성의를 보이며 열심히 뛴 그는 10명 중 학교대표 육상선수에 이어 두번째로 골인을 했다.
"그것 봐라. 너도 열심히 하면 잘 뛸 수 있는데..."
그 자신도 믿기 어려웠지만, 그는 차츰 그렇게 달리기에 자신감을 붙여갔다.
고등학교에서도 잘 뛰었고, 대학교에서도 지치지 않고 뛰었고, 군대에 가서도 끝까지 뛰었다.
그는 자신이 토끼띠라서 잘 뛴다고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하지만 차범근선수에게도 은퇴의 시간이 오고, 맨발의 아베베도 더 이상 마라톤코스를 달리고 싶지 않는 때가 오는 법이다.
체육선생님이 권하는 운동선수가 되는 길을 가진 않았지만, 그도 더 이상 달리는 것을 즐기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
나오는 배, 커지는 엉덩이, 넘어서는 몸무게, 더 날씬해지는 하체...
무엇을 딱히 탓할 수도 없게 점차 그는 앉아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토끼도 은퇴를 할까?

어느날 해가 서산으로 뉘엇뉘엇 넘어갈 무렵.
그가 운영하는 사업장으로 한 명의 틴에이저가 들어왔다.
마침 직원 한 명은 화장실에, 또 다른 직원 한 명은 사무실에서 공부하는 중이라 주위엔 아무도 없어서 그가 이손님을 대하게 되었다.
"급해서 그러는데 전화 좀 쓸 수 있을까요?"

무선전화기들이 놓여 있어야 할 자리가 빈 것을 보니 직원들이 사무실로 다 가져간 모양.
할 수 없이 그는 전화기를 가지러 사무실로 들어간다.
순간, 무언가가 끌리는 소리와 함께 사업장 문밖으로 뛰어나가는 재빠른 발자욱 소리.
그는 전화기를 집으려다 뭔가 짚히는것이 있어 바로 뒤로 돌아 뛰어나갔다.
카운터쪽을 돌아 문쪽으로 뛰어가며 카운터 위를 흘겨보았다.

불우이웃돕기성금 모금함!
사업장엔, 연말이면 항상 카운터 위에 크리넥스 두 개 정도 크기의 불우이웃돕기성금모금함을 놓고있었는데, 그것을 들고 뛴 모양이다.
이 녀석이 가져갈 것이 따로 있지...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문밖으로 뛰어나가자 녀석이 저만치 모금함을 끼고 달아난다.
내가 왕년엔...

뚱뚱해진 토끼가 다시 뛰기 시작했다.
쿵쾅쿵쾅쿵쾅... (이 정도면 거의 하마급 토끼인데... --;;)
전력질주를 시작하니 몸무게의 균형이 안맞는지 뭔가 박자가 잘 안맞는다.
숨이 턱턱 거리면서 턱 밑까지 차오른다.
헉헉, 거기 서! 헉헉...
달려라, 토끼야.

녀석은 건물 코너에 자전거까지 미리 준비해놓았던 모양이다.
코너에 다다르자 흘낏 그를 돌아보더니 자전거에 올라 페달을 신나게 밟아나가기 시작한다.
번개 같은 솜씨로 화단을 건너 뛰고 셔츠자락을 뒤로 날개처럼 휘날리며 달려간다.
으랏차차!
그도 옛날을 생각하며 화단을 뛰어넘고 (한쪽 발만 성공) 죽어라 달려보지만, 자전거와의 간격은 점점 벌어지기 시작하고... 끝내는 시야에서 놓치고 만다.
토끼야, 토끼야, 뚱뚱해진 토끼야... --;;

숨을 쉭쉭, 땀을 뻘뻘 흘리며 사업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그 십대가 아침나절 사업장에 왔었던 걸 기억해낸다.
그렇지! 이녀석, 넌 잡았다.
아침에 왔을 때 모금함을 눈여겨 보았다가 사람이 뜸한 시간을 골라 훔치러 온 모양이었다.
그는 아침 동안의 사업내역을 조사하여 녀석에 대한 정보를 끄집어 내 연락을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넘겨준다.

늙은 토끼가 느릴 순 있어도 영리한 걸 잊으면안되지... ^^
토끼는 늙어도 토끼인거야.

2010년 호랑이의 해가 저물어가 2011년 토끼의 해가 다가오고 있다.
흔히 토끼의 장점은 임기웅변이 좋고, 잔꾀가 많으며, 재주가 있고, 부지런하며, 판단이 신중한 것이라고 하며, 단점은 참을성이 부족하고, 구설이 많고, 경솔하고 자만해지기 쉽다 라고 이야기한다.
운세나 토정비결을 무작정 믿자는 것이 아니라, 믿건 안믿건 토끼의 해엔 토끼의 좋은 점들만 배우고 받아들여서 우리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일신 우일신(日新 又日新) 이면 연신 우년신(年新 又年新) 아니겠는가?


PS. 경찰은 녀석을 잡아, 모았던 성금 $172 중 $124 를 회수하였다.
삼진아웃제 때문에 토끼는 인정을 보여 녀석을 기소하지 않기로 하였다.
도둑을 쫓아서 뛰어다닌 토끼는 몇 년이 지난 오늘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고 한다.
절대 본받아선 안된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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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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