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오십부터래...

인생은 오십부터래... ^^

2011년 7월 24일 일요일

할아버지의 의자



할아버지의 의자







옛날, 우리 할아버지댁엔 잘 생긴 의자가 하나 있었다.
옛날이라고 말하고나니, 마치 호랑이가 장죽에 담배 피고 동굴 속에서 미련한 곰이 눈물 찔금찔금 흘리며 마늘 먹던 시절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한 40여년밖에 안된 옛날이다.

하여튼 할아버지댁엔 참 잘 생긴 의자가 하나 있었다.
잘 생겼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목구비 뚜렷하고 어디 한군데 뭉그러지지 않고 잘 빗어진 모습을 두고 말함이리라.
그 의자도 그러했다.

비틀림 한 번 없이 똑바로 자란나무로 만들어진, 어느 한쪽에서 보아도 찌그러짐 하나 없는 기골이 훌륭한 의자로, 어떻게 앉더라도 삐그덕거림 없는 단단함이 있었다.
등받침이나 팔걸이에 어떠한 장식도 없이 투박해 보이던 그 의자는 마치 옛날 (이번엔 진짜 옛날이다) 동헌마루 한가운데 놓여져 관할사또께서 앉으시던, 또는 암행어사 출두 후의 이도령이 앉아 변학도의 학정을 엄히 다스릴 때 앉던, 그런 위풍당당한 의자였다.
또한 팔걸이에 갖다댄 팔굽받침은 모서리를 고운 사포로 문질러부드러운 곡선을 주었고 부식을 막기 위하여 표면엔 연한 청색이 감도는 회색칠을 하여 마감한 단아함도 있었다.

하지만 이 잘 생긴 의자가 생긴대로 쓰이는 것은 본 적이 없다.
돐 사진이라든지무슨 제례라든지 할 때 쓸만도 하련만 그런 경우는 없었다.
게다가 의자 주인인 할아버지께서 워낙 입식생할 스타일과는 거리가 먼 관계로 할아버지께서 그 의자를 찾는 경우 마저도 없었다.
그 의자는 할아버지가 쓰시는 안방 뒤의, 큰 유리창으로 햇살 잘드는 복도에 언제나 덩그라니 혼자 놓여있을 뿐이었다.

아침이 밝아오고 따뜻한 햇살로 의자가 달구어질쯤이 되면, 나는 그 의자를 찾아가 앉곤 했다.
할머니가 하시던 만화방에서 가져온 만화책도 읽고, 셋방 조선생님이 빌려준 어려운 과학학습만화도 읽고, 서울에 있는 아빠 엄마 누나와 같이 있는 그림도 그리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공상... 그리고 그에 어김없이 이어지는 낮잠... 다시 깨나면 또 다른 공상의 시간이었다.
할아버지의 의자에 앉아 때로는 할아버지처럼 위엄도 부려보고, 때로는 마치 서울이 보일 것 마냥의자 위에 까치발로 일어서보기도 했다.

한 11시쯤 되면, 건너편 길가의 종아누나 할아버지가 하루도 빠짐없이 곱게 한복을 차려입으시고 외출하시던 모습도 보이고, 저쪽 양조장쪽으로 난 노란색 벽 다방이 시시덕거리며 드나드는선남선녀들로 바빠지는 것도 보였다.
멀리 바닷가에서 퉁퉁거리며 드나드는 담치잡이 배들이나, 스피커로 유행가 소리 한껏 울리며 울긋불긋한깃발 휘날리며 들어오는 여객선 소리도 끼룩대는 갈매기 소리와 어울어지게 들을 수 있었다.

가끔 가다 이 의자는 마당으로 호출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건 바로 내가 이발할 경우였다.
양쪽 팔굽받침을 가로질러 널판지를 하나 올려놓고 그 위에 앉으면 모든 이발사(?)들이 좋아하는 높이가 되었다.
하얀 보자기 하나 목에 두르고 간지러운 얼굴을 참으려 오만상을 다 짓다보면 어느새 보자기엔 머리칼이 수북하고 '아이, 잘 참았네...' 하는 칭찬과 함께 커다란 박하사탕 하나가 주어졌다.
그 때 가위를 휘두르던 그 아마츄어 이발사들의 솜씨를 지금 논할 수는 없지만, 나 역시도 이성이 존재하지 않던 시대였던지라 미학적인 관점을 논할 수가 없었다.

또 한동안은 이 의자가 대청마루 한가운데에 위치한 적도 있었다.
그건 순전히 조카를 끔찍히도 사랑했던 우리 고모 덕분이었다.
어느 비오는 날, 나를 업고 마냥 마당을 뛰던 고모는 그만 미끄러져 넘어지고 그 등에 업혀있던 나는 떨어지며 보기좋게 한 팔을 분지르고 말았다.
고모는 할아버지의 의자를 대청 한가운데 가져다 놓고, 한팔에 기브스한 나를 앉히곤 심심해하지 말라고 자신이 빨래하고 설겆이하는 구경을 매일 시켜주었다.
다른 한 손엔 사과 하나 쥐어주고...

할아버지께서 중풍으로 쓰러지시고 나자그 의자는 더욱 더 효용을 잃어만 갔다.
이제 더 이상은 쓸모가 없어보였다.
안방의 뒷복도에 언제나 그렇듯 덩그라니 놓인 채로 먼지만 두께를 더하고 있었다.
거동 못하는 중풍환자의 완연한 병색과 가래 섞인 기침소리와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할아버지방의 뒷복도를 말없이 지키며 있을뿐이었다.

의자도 역시 점점 낡아가고 있었다.
반짝이던 칠도 퇴색하고 군데군데 못질한 곳에 녹이 슬고 다리 한귀퉁이엔 작은 곰팡이도 생기고... 전반적으로 주름골들이 깊게 나타나고 있었다.
고모가 할아버지를 위해 담배곽의 은박지로 만든 방석만 의자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몇 해 겨울을 못넘기고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직전 할아버지는 사랑하는 손자를 마지막으로 찾으셨고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죽음의 공포 앞에 얼어붙어 있는 나의 손을 잡으셨다.
할아버지, 나 여깄어요 해라.
큰소리로 할아버지, 저예요 해.
어른들은 아무 말 못하고 있는 나를 자꾸 채근하고, 할아버지는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자꾸만 나의 이름을 부르셨다.
미안해요, 할아버지.말이 안나와요...
결국 대답은 커녕,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면서 나는 할아버지 손을 놓고 방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할아버지의 젯상을준비하면서나는 그 잘 생긴 할아버지의 의자를 다시 보았다.
눈처럼 밝은 흰 천을 두르고 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을 가슴에 품은 채 젯상과 할아버지 시신을 가린 병풍 사이에 굳은 모습으로 서있던 그 할아버지의 의자를 보았다.
마치 주인의 마지막 길을 인도하려는 듯이...
마치 이 날을 위해 많은 세월을 묵묵히 기다려온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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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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