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오십부터래...

인생은 오십부터래... ^^

2011년 7월 24일 일요일

달콤한 복수



달콤한 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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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등학교 땐 제2 외국어 과목이 있었다.
말로만 선택과목이었지, 문과는 무조건 불어, 이과는 무조건 독일어를 선택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예비고사에도 제2외국어는 한 문제도 나오지 않기 때문에 수업배당도일주일에 한시간씩에 불과하여 선생님 얼굴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새로 온 젊은 독일어선생님은 이같은 현실에 나름 생각을 정해서,
"나는 혼자 강의를 할테니까 원하는 사람은 영어를 공부해도 좋다. 단 떠들면 죽는다."
하고 선언하곤,
"그 대신 너희 반은 오후 첫시간이니까 항상 음료수를 하나씩 교탁에 준비해놓도록! 아, 그리고 참고적으로 말하는데 난 오란씨가 좋다."

우리는 알량한 학급비에서 돈을 빼 매주 수업시간 마다 오란씨를 한 병씩 갖다받쳤고, 그 댓가(?)로 점심식사 후 나른한 한시간 동안을 자습시간처럼 여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때론 정신머리 내놓은 주번녀석이 오란씨를 잊어버려, 계약위반(?) 으로 빳다를 맞기도 했지만 그런대로 선생님과 학생들과의 합의는 무난히 지속되었다.
가끔 그가 오란씨에 손을 안대는 경우엔 햇볕 안드는 교실 창가에 잘 두었다가 다음주 수업시간에 또 내놓는 때도 있었다.

아마도 그러한 경우였나 보다.
한번은 선생님이 오란씨를 마시려고 병을 잡았다가 눈이 동그래져 주번을 불렀다.
주번이 앞으로 나오자 그는 오란씨 병목을 손바닥으로 감싸더니 한바퀴 빙 돌린 후 그 손바닥으로 주번의 얼굴을 훑어내렸다.
그러자 주번의 얼굴엔 위에서 아래로 회색줄이 다섯가닥이 생기는 거였다.
"기왕 줄 거 좀 먼지라도 털어서 주면 안되냐?"
선생님도 주번도 벌개진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고, 
결국 그는 씩씩거리며 오란씨를  남겨두고 교실을 떠났다.

그 오란씨는 다시 햇볕 안드는 창가로 가 일주일을 지냈다.
그리고 다음 주 다시 독일어시간이 돌아오자, 다음주 주번은 거울 앞에 걸려있는 수건을 가지고 정성스레 병목을 닦아준 후 오란씨를 교탁 위에 올려놓았다.
저번 시간에 기분이 안좋았던 독일어 선생님은 교실에 들어와 의식하지 않는 척 하면서 한시간동안 수업을 진행했다.
시간이 끝나갈 무렵이 되자 그는 그제서야 오란씨가 있었다는 것을 안듯이,
"오호... 또 정성껏 준비를 해줬으니 마셔야 되겠군?"
하곤 오란씨의 병마개를땄다.

언제나 그렇듯 60명의 120개 눈동자가 그의 커다란 아담스 애플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다시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꿀떡. 꿀떡. 꿀떡...
여느 때처럼 그 다음에 캬~ 하는 단발마가 뿜어져 나왔어야 했거늘, 오늘은 반응이 이상했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 하며 입맛을 쩝쩝 두어번 다시더니, 주번을 불렀다.
어리둥절 하여 주번이 교단 앞으로 가자 그는 오란씨병을 내밀었다.
"너 마셔."
주번은 이게 웬 떡이냐 하는 표정으로 싱글거리며 오란씨를 받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지만 곧 주번은 에퉤퉤 하며 입안의 액체를 뱉어내며 물러섰다.
주번을 쏘아보고 있던 선생님은 험상궂은 얼굴로 반 전체를 둘러보았다.
"너희는 X새끼들이다. 싫으면 싫다고 이야기 할 것이지 이런 식으로 사람을 가지고 놀아? 알았어. 앞으로 내가 어떻게 너희를 대접해줄지는 상상에 맡기도록."
빠르게 말을 마치고 나자 그는 벌건 얼굴로 교실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어리둥절해 하는 아이들 틈 사이로, 눈을 지긋이 감고 미소를 머금은 채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은 지난주 주번 녀석의 느긋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름, 그녀석의 복수였다.
어제 방과 후 교실에 남아 공부했던 아이들의 수근댐에 따르면 지난주 주번녀석이 오란씨를 마셔버리고 그 병에 실례를 했다던가...
다음주 수업시간이 시작되도록 나타나지 않는 선생님을, 반장과 부반장이 교무실로 찾아가 손이 닳도록 빌고 빌어 겨우겨우 다시 우리반으로 모셔오게 된 것이며, 앞으론 꼭 밀봉된 박카스만을 갖다놓는 것으로써 사과를 받아들인다는 그의 일성... 등이 뒷이야기.

방위병 J는 우리 사무실에 배치된 제일 쫄병이었다.
아침마다 장교들보다 조금 먼저 출근하여 사무실을 깨끗하게 하고 사무기기들을 바로 쓸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아침임무였다.
추가적인 것이라면, 과장님 책상에 신문 챙겨놓는 일, 병과장의 결재난 문서들 받아오는 일, 아, 그리고 아침마다 냉수 한 컵씩 K대위 책상에 떠놓는 일 정도...

매일 K대위 책상 위에 냉수 한 컵 떠놓는 일은 사실 K대위가 개인적으로 부탁한 일이었다.
당시 군대는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개인적인 일을 지시해서는 안되는 것이 룰이었기 때문에 대령들도 자신의 구두를 닦기도 하고 은행도 직접 다니곤 하던 때였다.
지금은 또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지만...... ^^
그래서 J가 이 일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한 거였다.

하루는 K대위가 아침체조를 마치고 돌아와 책상에 앉으며 마주 앉은 무길도한량에게 말했다.
"난 말예요, 이 아침에 체조하고 시원한 냉수 한 컵 마시는게 얼마나 좋은 줄 모르겠어요. 무길도 중위도 맨날 커피만 마시지 말고 냉수를 한 번 들이켜 봐요.이 지역은 물도 끝내주거든..."
그러다 컵 뚜껑에 눈이 간 K대위.
"이 컵, P소령님한테서 선물 받은건데... 괜찮죠? ...에이, 뚜껑에 먼지가 좀 꼈네..."
그는 컵 뚜껑을열어 눈앞으로 가져가 이리저리 훑어본다.

이어서 컵으로 그의 시선이 내려간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컵을 들여다 보던 K대위, 얼굴이 점점 벌개지더니 J를 다급히 부른다.
J가 책상 옆으로 다가오도록 그는 컵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매일 물 떠다줘서 고마운데 말이지..."
"예..."
"냉수에 물방울이 왜 있지?"
아무 말 못하고 말 없이 서 있는 J.

"너, 침 뱉었지?"
K대위의 질문에 그게 어쩌고 하며 슬금 말꼬리를 흐리는 J.
J의 모습에 더 확신을 갖게 된 K대위, 목부터 벌겋게 상기되기 시작하며 인상이 찌푸려진다.
"이게 처음 아니지?"
J는 아무 말 못하고 고개를 푹 떨어뜨린다.
"내가 항상 뚜껑에 난 구멍으로만 마셔서 발견을 못했지, 컵 뚜껑을 열고 마셨으면 오늘처럼 금새 알았을텐데 말야?"
망연자실하여 창 밖을 바라본다.
"하기 싫다면 하기 싫다고 말을 하지..."

"얼른 잘못했다고 해, 이녀석아."
옆에서 보던 R사무관이 웃음을 참으며 J를 꾸짖는다.
"아닙니다. 근무 중인 대한민국 공군장교를 위해하려는 녀석은 엄히 다스려야 합니다."
K대위는 벌떡 일어나 방위병의 팔을 잡아 사무실 밖으로 끌고 나간다.
"무길도 중위, 좀 말려봐요."
R사무관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무길도한량을 바라본다.
"괜찮아요, R사무관님도 K대위님 알잖아요?"
"그래도..."

10분쯤 지나 둘은 자판기 커피를 하나씩 뽑아들고 싱글벙글 사무실로 돌아왔다.
"영창에 안보냈네요?"
무길도한량이 K대위를 향해 빙긋이 웃으며 묻는다.
"앞으로 잘하기로 했어요. 그대신 내가 일주일에 한번 커피 사주기로 하고..."
빙그시 웃으며 커피를 마시는 J를 보며 무길도한량이 묻는다.
"야, 너 솔직히 말해서 몇 번 그랬냐?"
"증말 오늘 처음이어유~."
"그럼 너 왜 아까 대답 안했어?"
"그건 그냥 K대위님 더 약올릴려고 그랬쥬~."
믿거나 말거나... ^^
녀석은 제대할 때까지 매일 냉수를 떠놨고 매주 커피를 얻어마셨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복수는 자행되고 있다.
마냥 당하고만 살것 같은 사람들도 은근히 복수를 한다.
오히려 은근하고 은밀한 그 맛에 달콤함을 더 느낄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이유없는 꾸지람에 슬그머니 엄마의 옷에 껌을 붙인 사람.
출근길 신경질내는 고모의 구두 안에 밥풀 두세개 떨구어 놓은 사람.
안놀아주는 삼촌의 노트에 모른척하고 볼펜으로 만화그린 사람.
성질내는 앞좌석 친구의 교복 등의 박음질을 칼로 살짝 끊어놓은 사람.
잘난체 하는 녀석, 채변봉투 몰래 버리는 사람.
나쁜 녀석들 책가방에 있는 김칫병 거꾸로 세워놓는 사람
......
또 뭐 없나...? ^^

약자들에 의해 행해지는 복수들은 더 큰 희열을 주기도 한다.
지렁이도 꿈틀하는 법이여... ^^
가만 있자, 우리 꼬맹이 녀석들이나 나를 향해 몰래 준비하고 있는 복수는 없을까?
우리 사업장 직원들은?
갑자기 뒤가 근질근질거려오는 이유는 또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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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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