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오십부터래...

인생은 오십부터래... ^^

2011년 7월 15일 금요일

할머니 전상서


할머니 전상서








사십이 넘은 나이까지도 나는 할머니와 윗층 동무,아래층 동무 하며 살아왔다.
윷놀이도 같이 하고, 때론 십원짜리 민화투도 같이 치고, 또 때론 씨름도 하면서...
일곱 남매를 키우시느라 훈장처럼 늘어진 젖가슴을 놀려대면, 할머니는 눈으로는 웃으시면서 입으로는, 
"그려, 이눔아. 네가 도와준거 있어?"
하시면서 날 붙들려 하시고, 나는 또 슬쩍 도망가는 척 폼만 잡는 형국이 반복되곤 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맏손주를 사랑하셨던 할머니의 임종을 나는 지켜지 못했다.

시집가기 전까지 우리와 같이 살았던 막내고모는 항상 뒷쪽에 고민이 많았다.
여자들이 그 문제로 많이 고생하기는 하지만, 막내고모는 유독 그 문제가 심각했고, 수시로 약에 의지하여 그 생리적인 문제를 해결하곤 하였다.
그래도 처녀의 자존심이 있는지라, 약국에서 '둘코락스' 라는 약 이름을 과감히 외칠 수 없는데에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그 약이 떨어지면 나에게, 우리 어머니에게, 또는 할머니에게 부탁하기 일쑤였다.

그 날은 할머니께서 주일 저녁예배를 다녀오시던 날이라 할머니께 그 역할이 돌아갔다.
우리 할머닌삼일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 태어나신 분이라 영어와는친분을 기대하기엔 조금 무리였던 세대.
버스에서 내리신 할머니는골목 입구 모퉁이에 자리한 희경약국으로 들어가셨다.
"어서오세요, 할머니."
"잉~, 안녕하슈-"
"무엇을 드릴까요?"
"잉~, 우리 딸내미가 거 뭐시기냐, '둘-모시기' 를 사오라 했는디..."
할머니는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고모가 써드린 메모지를 꺼내려 했다.

가만, 이런... --;;
아까 버스를 탔을 때, 따뜻한 히터 바람에 얼었던 코가 녹으면서 흐르자주머니에서 손수건을 찾으려 하셨다.
하지만 손수건을 당신의 방 안 경대 위에 꺼내만 놓고 주머니에 넣지 않았음을 상기하시고, 주머니를 뒤적뒤적하며 대체품을 찾다가 하얀 메모지를 발견, 부들부들 양손으로 잘 부빈 후 코를푼 것이 생각나셨다.
코 묻은 메모지?
그건, 버스에서 내린 후 자랑스럽게 정류장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셨다.

아- 이젠 도저히... 기억해내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뭐 였더라... 둘...둘? 
아니... 돈... 그래, 돈꼬...
아! 그래 맞다. 그거였군 그래.
"기억나셨어요, 할머니?"
기다리는 다른 손님의 눈치를 살피며 약사가 할머니께 물었다.
암, 이것이여.
"잉~, 똥 누는 동까쓰 주시여."

할머니는 당당하게 우리 모두 앞에서 똥 누는 동까쓰를 내보이며 으시대셨다.
봐라, 나도 할 수 있단 말이여!
기적적으로 임무를 완수해내신 할머니의 무용담을 들으면서 온 가족은 쓰러지고 말았다. ^^

우리 할머니와 개들과의 전쟁은 이미 '깡패 길동이' 편에서 언급된 적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할머니께선 개를 좋아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갈등의 요인은 상존하고 있었다.
더듬더듬 할머니방에 무심코 들어갔던 어린 길동이.
그는 할머니의 풍차돌리기에 의해 마당 한복판으로 집어 던져지고, 급기야 그 다음날 아침 할머니의 하얀 고무신 안에 예쁘게 누런 또아리를 만들어 놓는다.
분기탱천하신 할머니는 마당비를 들어올려 길동이를 사정없이 공격하게 되고...

우리 동네의 온 집들이 한 패의 (어쩌면 두 패의) 도둑들에 의해 차례로 털려나가기 시작하자, 아버지께서는 우리집 야간방어의 막중한 책무를 길동이에게 일임하시기에 이르렀다.
밤 열 시가 되면, 길동이는 개집에서 풀려나와 마당 전체를 마음대로 활보할 수 있게 되었다.
때로는알 수 없는고양이의 앙칼진 소리가 길동이의 으르렁 거리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그의 임무 수행은 오우케이였다.
그가 잠에 빠지지 않는 이상은...

초생달인지, 그믐달인지, 하여간 달도 희미한 어떤 밤이었다.
주무시던 도중, 마당에서 나는 이상한 기척 소리를 감지하신아버지는 일어나 마당으로 향한 창문을 살그머니 여셨다.
그리고 내다본 창문 밖의 풍경에 당신께선 소스라치게 놀라셨다.
교교히 흐르는 달빛 속에서 하얀 속치마를 입고백발을 휘날리며 한 노인이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며 길동이와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가만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할머니가 길동이를 마당빗자루로 사정없이 공격하시는 중이었고 길동이는 그것을 정신없이 피하고 있던 것이었다.

"어머니, 뭐 하세요?"
"이눔이 계속 현관문을 긁어대는 통에 잠을 잘 수가 없어서..."
할머니는 아버지의 만류로 길동이를 공격하시기는 멈추시나, 잊지 않으시고 길동이의 잘못을큰소리로 꾸짖으셨다.
"너때문에나만 정신병자로 오해받겠어, 이눔아."
자리에 누우시다가 아버지께서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셨다.

할머니는 어린이날이 되면 모든 어린이들(?)의 선물을 챙기셨다.
아버지, 어머니,나, 누이들 그리고 그 살붙이들....
양말 한켤레, 손수건 한 장이라도 정성껏 포장을 하고 그 위에 삐뚤삐뚤한 글씨로 이름을 다 적어 놓으셨다.
아범, 에미, 맏손주, ㅇㅇ,xx,ㅁㅁ......

지난 여름 마지막으로 뵙고 한 달 만에 할머니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임종과 발인을 모두 지키지 못한 맏손주는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선물을 투박하신 손으로 건네주시던 할머니를 기억하며 하늘나라에 편지를 쓴다.

할머니, 잘 계시죠?
.......

이 맏손주도 잘 지내고 있어요.
.......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2009.05.05)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