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오십부터래...

인생은 오십부터래... ^^

2011년 7월 15일 금요일

호모 츄리닝스


호모 츄리닝스







"아빠, 이 츄리닝 이젠 그만 입어야겠어."
"어...그래. 안그래도 그만 입을타이밍을 잡고 있어."
가만히 발치에 앉아 이야기를 듣던 막내가 내 츄리닝 무릎에 난 구멍을 손짓하며 말한다.
그렇지 않아도 매제가 준 새 츄리닝도 두 벌이나 있는데다, 집사람의 성화로 인해 이제나 저제나 그만 입을까 하고 벼르던 중이었다.
그런데막상 버리려면참 쉽지 않은 것이, 낡고 헤진이 츄리닝이 오랫동안 나름대로 나의 몸의 곡선에 따라 변형이 와서, 들어갈데 들어가고(?) 나올데 나온 것이 내겐 너무나도 편안함을 준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몇 년이나 입었을까?
아마 첫아이 걸을 무렵에 문래동 홈플러스에서 샀으니 7~8년은 족히 되지 않았을까?

'츄리닝' 이라는 것이 언제 처음 나왔는지 알기는 참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 이후, 의류산업이 우리나라 경제의 성장엔진으로 두각을 나타내면서 보세품이다, 해외주문취소품이다, 뭐다 해서 그 옛날 우리가 보지도 듣지도 못하던 것들이 국내로 마구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츄리닝이란 것이 그렇고, 운동화가 그랬다.
곧이어 정식으로 아디다스니 나이키니 프로스펙스니 하는 브랜드들이 빠르게 하이엔드 소비자들의 마음을 파고든 것은 물론이다.

그럼 그 전까지는 운동할 때 무엇을 입었나? ^^
뭐, 별거 있나?
하얀 난닝구 (쯧, 이런 말 쓰면 안되는데, 당시 분위기를 살리는의미로...^^), 꺼먹 빤쓰에 기차표 동양고무나 국제상사에서 나오는 면운동화 (지금 아이들의 실내화로 쓰이는) 면 최고였다.
대부분 반팔 또는 소매 없는 스타일의 하얀 난닝구에는 가슴에 대문짝만하게 학교 마크가 검정색, 파란색, 또는 녹색 중 한 가지 색으로 찍혀져 있었다. 
그리고 겨울 체육복은 하얀 면으로 된 목티 스타일이었는데 가격이 비싸 못사는 아이도 많았다.
신발은 쉬 떨어져서 무척이나 아끼며 신던 때였다.
불편하다는 이유로, 달리기만 하면 '맨발의 청춘'이 되는 아이들도 많았다. ^^

이러다가,아까 이야기한 경제적인 이유와 함께 전국 사나이들의 가슴에불을 확 질러버린 사나이가 있었으니... 이가 바로 '이소룡' 이다.
그가 영화에서 선보인 노란색 츄리닝은지금 생각해도 참 시각적으로 강렬함을 주는 것이었다.
자, 이제 너도 나도 츄리닝을 입고폼을 잡기 시작한다.
츄리닝상의의 지퍼를턱까지 끌어올리고 소매는 팔뚝까지 반쯤만 걷어올린다.
조금 단정한 사람들은가죽운동화(인조가죽도 상관은 없겠지?) 를 신지만, 나를 포함한 젊은치들은맨발에 스레빠 (슬리퍼)를 빡빡 끌며 골목을 누볐다.
담배까지 하나 꼬나 물면 동네양아치들도 울고갈 만큼 압박감이 있었다.

한 번은 우리 어머니가 시장에 가시는데 길동무를 원하셨다.
어렸을 때, 순대 얻어먹는 재미로 쫓아다니던 때 이후로 이렇게 장성한 아들과 함께 시장을가신 경우는 참 드문 경우였다. (무척이나 심심하셨던 모양)
입대를 기다리는동안 잘 먹고 뿌옇게 살찐 모습으로 츄리닝 바람에 스레빠를 찍찍 끌며 따라 나섰다.
한참을 가시다가, 횡단보도를 건너려고신호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위 아래로 몇 번이고 훑어보시더니,
"조금 떨어져서 걸어라. 딴 사람들이 보면 조폭 아들인줄 알겠다." --;;;

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약사인 집사람과작전을 한참, 두참, 세참 세운 끝에 그래, 우리도 한 번 우리의 약국을 갖자는데 뜻을 모으고 사업계획서를 짜보려고 했다.
그리고 그 전에 자금수요를 가늠하기 위하여 눈여겨 보던 동네로 가서 자리 시세를 조사하기로 했다.
동네를 이리저리 살피다가 복덕방을 하나 발견하고 들어가서 시세를 묻기로 했다.
문을 드르륵 열자, 노인들 세 명이 앉아 화투를 치다가 안경 너머로 쳐다본다.
"안녕하세요, 부동산 시세 좀 알아보려구요..."
"뭐 찾는데...? 사글셋방?" --;;
억 대를 생각하며 들어온 사람에게 사글셋방이라니요???
문제는 바로 내 옷차림에 있었던 것이었다.
가까운 거리였기에 난 자유롭게 예의 그 츄리닝에 스레빠를 끌며 갔던 것이었다.

지구상에 존재했던 그 어떤 겉옷보다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입어지고 있는 츄리닝.
겉보기가 중요한 사회인 경우를 제외하면, 그야말로 천하무적의 효능을 가지고 있다.
산이라도 좋다, 물이라도 좋다.
여름이라도 좋다, 겨울이라도 좋다.
아이라도 좋다, 노인이라도 좋다.
남자라도 좋다, 여자라도 좋다.
.........................(또 없나?^^)
가격 좋지요, 유지비 안들지요, 쉽게 안떨어지지요......
신축성 좋지요, 입고 벗기 편하지요, 동료감도 만들어주지요......
하나만 있으면 되니 여러 모로 친환경적이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너무나 좋은 츄리닝이다.

아마도집집마다 츄리닝 없는 사람 하나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 13억 중국대륙에도 이 츄리닝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다.
이 지구상 매립 쓰레기장 어디에서고 츄리닝은 발견될 것이다.
그리고 훗날, 수억 년이 흐른 뒤 후세의인류들은 우리를 '호모 츄리닝스' 라고 부를지도 모를 일이다.






(2008.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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