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소묘(素描)

"에구- 햇살이 따뜻하니 좋구나"
할머니께서 대청마루로 나오시며 말씀하신다.
아직은 굵은 실로 짠스웨터를 걸치곤 있었지만 어깨 위로 내리쬐이는 햇살이 따숩다.
소년은 흘러내리는 콧물을 한 번 소매 끝으로 쓱 닦아올리며 할머니를 올려본다.
"무엇하고 있는겨?"
"이잉-. 여기 마루장 틈새배기로 햇빛이 들어가서 환하게 보여."
대답을 하면서도 소년은 여전히 마루에 엎드려 흘러들어온 햇빛에 훤히 치부를 드러내는 마루 밑을 들여다보고 있다.
할머니는 물끄러미 소년을 내려보시다가 기둥을 한 손으로 짚으시며 다른 한 손으론 눈썹 위에 차양을 만드시며먼데 산을바라보신다.
"보자-. 봄이 어디쯤 오는지 한 번 보자-."
"봄이 오는게 보이남?"
"그럼, 잘 보면 보이지."
소년은 벌떡 일어나 할머니처럼 한 손을 눈썹 위로 올리며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
"암것도 안보이는구만...?"
"잘 봐아-"
혹시 손의 위치가 잘못 놓여 자신에게는 잘 안보이는 것 같이 생각한 소년은, 할머니 손의 위치를 훔쳐보며 손바닥의 각도도 조절하고, 자신의 키가 작아서 그런가 하고 까치발도 하며, 눈을 좀더 가늘게 뜨고 무언가를 보려고 애썼다.
"뭐 보냐?"
마침 들어오던 큰삼촌이 섬돌로 올라서시며 물었다.
"이잉-. 할머니가 봄이 온다고 해서..."
삼촌은 피식 한 번 웃곤 신발을 벗고 올라와 소년의 등 뒤에 섰다.
"내가 보여주랴?"
"잉. 어떻게?"
"자아, 목에 힘주고 가만있어."
삼촌은 두 손바닥을 소년의 양쪽 귀 근처에 납작하게 붙이더니 그대로 소년을 들어올렸다.
소년은 얼굴거죽이 위로 밀려올라가면서 두눈은 째지게 양옆이 치켜올려지고 두발은 허공에 뜰둥 말뚱 대롱대롱 매달리는 형국이 되었다.
옆에선 할머니가 반웃음으로 삼촌에게 주먹을 흔들며 말리셨다.
"아,아,아,아, 내려놔-."
"보여, 안보여?"
"아,아, 내려놓으라니까!"
"그러니까... 보여, 안보여?"
"보여! 보여! 보인다구!"
그제서야 삼촌은 소년을 내려놓고 히죽히죽 웃으며 섰다.
"왜 그려-?"
할머니께서 삼촌의 어깨를 주먹으로 한 대 치셨지만 할머니의 표정에도 재미있어 하심이 역력했다.
소년은 눈물 글썽이는 눈으로 삼촌을 째려보며 아픈 양쪽 귀를 문질렀다.
"씨이- 아빠한테 일러줄거야."
"오, 그래? 그럼 이번엔 아빠가 어디 계신지 보여줄까?"
"에헤이- 쯧. 괜히 애 울릴라구..."
할머니는 다시 빙긋 웃는 삼촌 눈앞에다 주먹을 흔드시며 눈을 흘기셨고 소년은 재빨리 할머니 뒤로 가 숨었다.
"그래도 삼촌 덕분에 봄이 오는거 봤지?"
소년은 삼촌의 물음에 대답 대신 눈을 흘기며 할머니 뒤로 더 숨어들었다.
경칩(驚蟄)이다.
놀랄 경. 겨울잠 자는 벌레 칩.
말뜻대로 하면, 겨울잠 자는 벌레가 깨어나는 경칩...
가만, 개구리가 벌레에 해당될리는 없을텐데, 어쩌다가 개구리가 경칩의 대표선수가 되었을까?
만물이 생동하기 시작하는데, 우리가 제일 변화를 쉽게 느낄 수 있는게 개울가의 개구리 소리이기 때문이라면 쉬울까?
이 때가 되면 이제 나올 건 다 나오는게 정상이다.
잠 좀 더 잔다고 더 나은 한 해가 보장되는 건 아니니까...
북미쪽에도 재미있는개념이 있다.
바로 Groundhog Day 라는 것으로 날짜는2월 2일로 정해져 있다.
Groundhog 라는 것은 북미산 사향쥐의 일종으로 크기는 고양이만하고 겨울잠을 잔다.
그 날, 2월 2일이 되면, Groundhog 가 겨울잠을 자던 땅속 동굴에서 기어나오는데...
나왔을 때 날씨가 흐려서 자신의 그림자를 볼 수 없으면, 그들은 이제 겨울의 끝이 왔다고 생각하고 땅굴과 굿바이하고 떠나고, 만일 햇빛이 나서 자신의 그림자를 보면, 아- 아직 겨울이 끝나려면 6주를 더 기다려야 하는구나 하며 다시 땅굴로 들어가 잠을 더 잔대나 어쩐대나... ^^
이 때쯤 되면, 사람들은 어서 봄이 오길 소망하면서 서로에게 안부인사로 물어보곤 한다.
"Groundhog 보았어요?" 라고...
그 다시 들어간 Groundhog 도 이맘 때면 이제 나올 때가 되었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군것질거리 꿈틀이들이 유난히도 잘 팔릴터이고, 중학교에선 한 달 후 있을 첫 해부 실습대상이 개구리임을 예고하고 대대적인 개구리 포획작전을 수립하는 때이기도 하다.
대동강 물은 풀린 지 오래되었겠지만, 그 들판은 아직도 겨울인데...
우리 농가에선 한 해 농사를 위한 씨앗을 준비하고 집안 며느리들은 겨우내 서까래에 매달아 놓았던 메주를 선별하여 장을 담는다.
이즈음엔 모든 양치기 소몰이 소년들이 스테파네트를 꿈꾸며 활기차게 들판으로 나아가는 때이고, 겨우내 켜켜히 묵혀두었던 솜 이부자리 싸질머지고 나가 있는 힘을 다해서 빨래방망이로 두들겨야 할 때다..
아-, 바야흐로 봄이로구나.
오늘 아침 거울을 보며 옆머리가 덥수룩하게 자랐음에 놀라고 말았다.
한 달에 한 번, 집사람의 솜씨로 다듬어지던 머리가 새삼스럽도록 그렇게 느껴진건 아마도 겨우내 입고 있던오리털 조끼가 새삼 더 투박하고 덥게 느껴지는 것과 마찬가지 일게다.
아침향기 잔잔한 호숫가로 나가 새끼들과 아장아장 어정어정 아침식사 나오는 거위들을 구경하고, 나뭇가지 마다 새록새록 새순들이 움터나오는 봄기운을 느껴본다.
골짜기 골짜기마다 산들산들 봄바람은 구수한 보리차 냄새처럼 퍼져나가 고무채색으로 드리워졌던 산과 들은 이제 은은한 노란색과 연두색으로 다시 칠해지고 있다.
더 높아지는 하늘을 보며 우리의 가슴도 그만큼 높아지길 소망한다.
올해는, 이번 봄에는 좀더 생산적으로 살아가기로 하자.
귓가에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의 갯수보다 마음에 난 흰머리의 갯수에 신경을 써야지...
고집스럽고, 퉁명스럽고, 까탈스럽기 보다는 젊고, 생동감있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봄바람을 향해 써억 웃음짓는, 볼만한 인간이 되었으면 한다.
이 봄에는 말이지...

(2010.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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