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자(調停者)

따땃한 봄볕에 마을 어귀에 선 목련이 하나 두울 꽃잎을 떨굴 즈음,
먼 하늘가로 빙 돌아서 그녀가 왔다.
때는 바야흐로,
생명의 기세가 드세지기 시작할 무렵이듯이 우리 아이들의 기운은 떨쳐오르고,
상대적으로 쇠해가는 세대인 아비의 귓가엔 흰머리가 부쩍 눈에 띄일 때였다.
치열한 눈치싸움을 곁들인 헤게모니 쟁탈전이 슬슬 감정이 섞이기 시작하고, 인내심을 쥐어짜게 만들며, 서로의 정서가 메말라 가기 시작할 때였다.

힘들게 시간을 만들어 날아온 그녀의 귀소는 가치가 있었다.
아이들과 나에게는 십년 동안의 긴 가뭄 끝에 오는 단비와 같았다.
오랫만에 얼굴 마다 빙긋빙긋 웃음들이 배어나오고 뾰로퉁 했던 주둥이들마다 빠른 템포의 노랫소리가 낭랑히 은방울 마냥 울려댔다.
메말랐던 식탁엔 풍성함과 달콤함이 흘렀고, 같은 음식을 놓고도 덜 먹으며 배불렀다.
한 사람의 체온만이 더해졌는데도 난방히터를 켜지 않아도 될만큼 집안이 훈훈하게 느껴졌다.

역시 여자아이들인지라,
엄마와 함께 모처럼 쇼핑도 가고 미장원도 가고 오이맛사지도 하고...
Mr. Bean 비디오도 함께 보고, 한 이불에서 같이 뒹굴거리며 시시덕거리고...
아이들은 무엇보다도엄마와 함께 이야기를 같이 하면서 스트레스를 발산시키는 듯 했다.
엄마, 엄마, 있잖아...
엄마, 엄마, 있잖아...
엄마 피곤하니까 인제 그만 자라 하고 윽박지르고 눈도 흘겨보지만,
아이들의 이야기는 밤이 새도록 재잘재잘... 끝이 없다.

하기사 엄격한 아빠와 함께 지내면서 아이들도 좀 팍팍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긋나긋하고 다정다감한 엄마에게 때 늦은 어리광도 부리고, 여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고민도 나누고 하면 좋을텐데 말이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겪는 육체적인 변화만큼이나 감정의 변화도 심해지고, 여지껏 의식하지 못했던 많은 관심사들이 (특히 이성에 관한) 하루가 다르게 생겨나는 때인데 말이지...
만나자마자 아이들이 터뜨려대던 불평 불만 및 고충 애로사항의 보따리들을 그녀가 어떻게 대처했는지 나는 자세히 알지 못하나, 아마도 다음과 같이 이야기는 흘러갔을 것이다.

아이들: 이 중차대한 판국에 어찌하여 우리 옴만 우리와 함께 아니 계시나이까?
옴마: 아이들아, 우리들 마음은 항상 같이 있도다.
아이들: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빠의 압제로부터 우리를 구하소서.
옴마: 아이들아, 너희의 지혜가 자라매 그 시간을 짧게 하리라.
아이들: 쉬지 않고 우리를 몰아대는그를 책하소서.
옴마: 아이들아, 그의 마음도 나와 한가지라.
아이들: 칭찬은 코끼리도 춤추게 한다 했거늘...
옴마: 아이들아, 너희들은 코끼리가 아니니라. ^^
(그러니까 인제 고만 까불어.)

3박4일의 짧은 일정을 마치고 그녀는 다시 밤비행기에 몸을 싣고 일터로 돌아갔다.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만족스러워 하는 아이들의 표정.
그리고 다시금 아빠와의 대화의 테이블에 함께 하려는 제스츄어를 보이는 아이들.
나름대로 조정자로서, 단박에 가정의 안녕과 평화와 질서를 회복시키고 돌아가는 아내.
그녀는 반기문총장이었고, 유엔평화유지군이었다.
만세!
......
나?
아내가 성공적으로 회복시켜준 헤게모니를 가지고, 어떻게 아이들이 나의 노선에 반기를 들 수 없게 할까 목하 고민 중! ^^

(2010.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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