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오십부터래...

인생은 오십부터래... ^^

2011년 7월 11일 월요일

과수원길

과수원길























서울에서 장항선 완행열차를 타고 한 네댓시간을 흔드리다 보면, 홍성을 지나고 광천을 지나면서 짧은 플랫폼 하나만 달랑 놓인 조그만 역들이 줄줄이 나타난다.
원죽, 청소, 주포......
지금은 완행열차란 명칭도 없어지고 역주변으로 서해안 고속도로가 팡팡 뚫리는 통에 기차의 인기도 많이 떨어져서 결국 몇몇 소규모 역사들은 문을 닫게 되는데, 주포라는 역도 그 중의 하나였다.

"올라가는 기차가 언제 있는겨?~"
"시간 반 있으면 오쥬~"
봇짐 하나, 지우산 하나 챙겨든 등 꼬부라진 할아버지의 질문에 구멍 뽕뽕 뚫린 유리창 너머로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역무원의 목소리가 지금이라도 막 들려올것 같은 빈 역사에는 싸늘한 겨울 공기만이 외롭다.

역에서 나와 북쪽으로 조금 걷다보면 봉당리를 거쳐 광천-대천간 신작로가 있는 곳으로 뻗어있는 황토길이 오른쪽으로 갈라진다.
그 길을 따라 토닥토닥 걷다보면 왼쪽으로는 정리되지 않아서 구불구불한 논두렁들이 이어지고 오른쪽으로는 얕으막한 야산들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길이 다시 한 번 크게 오른쪽으로 구비치는 곳엔 아주 오래된 방앗간이 있어서 이곳을 지날 때면 항상 방앗간 발동기 돌아가는 소리가 씩씩하게 들리곤 했다.
황혼 무렵 그 앞에 오가는 땅강아지들은 얼마나 실했었는지......

방앗간의 소리가 멀어질 즈음 부터 나의 과수원길은 시작이 된다.
오른쪽으로 경사진 뒷문에서부터 야산을 타고 시작되는 과수원은 청년시절 나의 아버지께서 돌산을 개간하여 만드신, 달가스의 꿈이 서린 곳이다.
돌산을 짧은 시간에 푸르게 만들기 위해 야산을 빙 둘러 아카시아를 심고, 그 안에 황토를 캐고 벽돌을 만들어 두 개의 건물을 지어, 한 곳은 우리의 주거공간으로 또 다른 한 곳은 양계를 위한 공간으로 만들었다.
사과나무, 복숭아나무, 특히 당시에는 보기 어려웠던 천도복숭아나무 등 유실수가 보기좋게 줄지어 서있었고, 돼지우리에서는 꿀꿀대는 소리가, 닭장에서는 꼬꼬꼬꼬 하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오는 곳이었다.
아, 그리고 용감무쌍한 우리의 진돗개 럭키도 있었다.

과수원길을 따라 하얀 아카시아꽃길을 따라 야산을 돌아가면 멀리 면사무소 앞으로 뚫린 신작로가 보이는 곳에 과수원 정문이 있다.
넓직한 언덕길을 오르면 마치 정문을 지키는 초소 마냥 원두막이 그닥 높지 않게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어서, 여름엔 수박이랑 참외랑 갈라 먹으면서 시원하게 뚫린 포플러 신작로 위로 직행버스와 트럭이 달음질치는 것도 거기서 구경하곤 했다.
멀리서부터 여름 소나기가 쏟아지며 달려오는 것도 볼 수 있었고, 그 비를 피하기 위해 달아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재밌다고 깔깔 웃던 때도 있었다.

그 원두막을 지나면, 용맹한 럭키가 지키고 있는, 조그마한 우리집이 있었다.
아버지께서 손수 황토흙을 짚과 함께 반죽하여 벽돌을 만들고 그 벽돌로 벽을 쌓고 지붕을 얹은 두 칸짜리 살림집으로,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했던 이곳이 내가 태어난 곳이다.
한 때는 중풍이 드신 할아버지, 할머니도 모시고 있었던 이 집에선 모든 일꾼들과 같이 저녁식사를 하곤 했는데, 둥그런 한 상에 둘러앉아 쌀 한 톨 안들어간 꽁보리밥을 열심히 먹었다.
밥그릇 위로 올라온 밥의 양이 밥그릇 안에 담긴 밥보다 더 많은, 속칭 '고봉밥'에 막된장과 풋고추나 깻잎 같은 신선한 채소와 짠지 만이 상 위에 있었지만, 모든 사람이 미소와 함께 배 두들기며 일어서는 풍족한 한 상이었다.

마당에 모깃불도 피우고 평상 위에나 멍석 위에서 별보며 어머니에게서 옛날이야기도 듣고, 칙칙거려는 라디오의 뒷면을 탁탁 두들겨서 어떻게든 들어보고자 애쓰던 저녁도 있었다.
그리고 오래된 폐지들을 모아서 사과나 복숭아에게 씌워줄 종이봉투를 만드는 것도 짬날 때마다 하는 일과 중의 하나였다.
그렇게 해주어야 과일 하나하나가 수분이 촉촉하고 단맛이 진해진다고 하던데, 어렸던 내겐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풀칠을 제대로 하여야 하는 것이 큰 과제였다.

가을이 되면 탈곡기를 돌려대던 옆마당을 지나서 냄새나는 꿀꿀이네를 지나면 길은 두 갈래로 나뉘는데, 언덕 윗길로 가면 닭장이 있는 건물이고 아래로 가면 농장의 급수원인 재래식 펌프가 있었다.
항상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펌프물은 누나와 나의 즐거운 놀이공간이기도 했는데, 펌프로 물을 퍼올리고 손과 발을 닦고 조그마한 주전자에 새물을 담아 부엌까지 가져오는 것이 우리 남매에겐 매우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였다.
물론 어른들에게는 하나도 중요한 것이 아니었지만, 일손이 부족하여 같이 놀아줄 어른이 없는 아이들에게는 매일매일의 신성한 의식이었고 새로운 어드벤쳐였다.
돌아오는 도중에 어떤 못된 돼지가 한 번 크게 꽤액대면 두 아이는 주전자고 뭐고 다 내던지고 혼비백산하여 도망오기 일쑤였다.

닭장에 가면 내가 셀 수 없을 만큼의 닭들이 꼬꼬댁거리며 떠들어댔다.
뭐든지 정신없이 먹어대는 닭들이 나를 좋아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하얀 달걀들을 내어놓는 닭들이 참 좋았다.
양계장집 아들이면서도 달걀 한 번도 마음껏 먹어본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닭이 좋았다.
달걀들의 일부분은 병아리가 되기도 하고, 일부분은 달걀 상태로 팔려나가기도 하고, 또 일부분은 할아버지 진지 속에 비밀히 자리하기도 했다.
40여년이 흐른 지금도 달걀이라면 정신 못차리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 때 실컷 못먹은 한이 아직도 내게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따뜻한 햇살 속에 만발할 복숭아꽃들을 생각하며 언덕을 내려오다 보면 이제 다시 아카시아꽃 하얗게 떨어질 과수원길을 따라 처음에 마주했던 과수원 뒷문에 이른다.
신작로에서 주포역쪽으로 보면 오른쪽으로 우뚝, 소가 누운 형상으로 자리한 과수원.
그 곳을 팔아야만 했던 암울했던 시절이 지난 후, 우연찮게 그 신작로를 달리면서 우리 과수원길 일부가 뭉턱 깎여져나가 뻘건 흙을 드러내고 있는 걸 보았을 때, 아버지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과수원을 산 사람이 산을 깎아내어 그 황토흙을 팔아먹은 것이었다.

아버지의 청년시절 꿈이 서려있고 내겐 태어난 곳으로서 의미가 있는 과수원이 상해나간 모습에 마음이 좀 짠-해져서 백미러를 통해 아버지를 힐끗 쳐다보며 여쭈었다.
"좀 여유 있을 때 우리 과수원 다시 살까요?"
"그렇지 않아도 나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다만 추억은 추억으로 남아있을 때 더 아름다운거 아닐까? "
잠겨드는 목소리로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다시 과수원을 안보시려는듯 두 눈을 지긋이 내려감으시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내가 괜한 말씀을 꺼냈나 싶어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신작로에 늘어선 포플러들이 아름드리로 자라있었다.

(2008.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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