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병아리

담장 너머로 개나리꽃들이 하나 둘씩 고개를 쳐드는때가 되면, 학교 파하는 골목길에는 소위 말하는 '잡상인'들이 하나 둘씩 자리잡기 시작한다.
칡뿌리장수, 풀빵장수, 소라고동장수, 뻔데기장수, 엿장수, 병아리장수......
엿장수, 달고나장수, 강냉이장수, 가끔가다 야바위꾼, 또 병아리장수...!
하나 하나 기웃거려 가면서 집에 돌아올라 치면 15분 통학길은 어느새 1시간이 넘어버리기 일쑤이고, 아직 다 둘러보지도 못했는데 벌써 짐 거둬들이여 돌아갈 채비하는 '잡상인' 들도...
다른 장수들의 다이에서는 친구들 어깨 틈으로, 또는 어깨 너머로 머리만 삐죽하니 내밀어 슬쩍 들여다보고 지나칠 수 있지만, 그러지 못하는 다이가 하나 있었다.
병아리, 병아리, 병아리...
병아리네에서는 가방을 내리고 그들 앞에 퍼질러 앉아야 그들의 눈도 보고, 아주 조그만 삼각형 부리도 보고, 주인이 안보는 사이 소름끼치도록 부드러운 그들의 노오란 털도 살짝 쓰다듬어 보고... 할 수 있다.
병아리들은 보통 보리박구에 담겨져 있었다.
첫번째 보리박구엔,소년의 주먹 만큼이나 아주 조그맣고 샛노란녀석들이 한 십여 마리담겨 있는데, 한마리 10원이라고 까만 매직으로 상자 위에 써놓았다.
이들은 아직 날씨가 좀 춥게 느껴지는듯 또래또래 모여서 삐약거리기에 열심이다.
가끔씩 구석에서 혼자 떨며 조는 녀석은 아저씨가 집게손가락으로 한 번 궁둥이를 툭 건드려주면 깜짝 놀라 자기 친구들모인 곳으로 가지만,잠시 후 또 조는 경우가 많다.
울음소리는 삐약. 삐약. 삐약 ..... (쉬지 않고)
두번째 보리박구에는, 그 첫번째 보리박구에 있는 녀석들 보다 아주 약간 크고 털도 조금 더 많이 자랐고 색깔도 조금 더 연노랑에 가깝게 변한 녀석들로 한 마리 20원씩 이다.
벌써 먹을 것에 상당히 관심이 많아서 병아리장수의 손을 따라 바삐 움직인다.
혹시나 저 손에서모이라도 떨어지려나... 치켜보느라 목들이 모두 외로 꼬였다.
시골 마당에 엄마닭이 봄나들이 산보시킬 정도의 크기인듯 하다.
울음소리는뺙. 뺙. 뺙.뺙. 뺙...
세번째 보리박구에는 제법 커서 몸통이 손바닥 보다도 커보이는 녀석들이 대여섯 마리 있다.
움직임도 벌써 뒷짐진 듯한 자세로 묵직해보이고 날개짓을 하면서동료들 등을 뛰어넘기도 하고 보리박구에 발톱 부딪히는 소리가 벅벅하고 날 정도로 튼실한 녀석들이다.
천천히 걸어 다니다가 목소리도 가끔, 아주 가끔 옆의 동료에게 묵직한 인사를 건넨다.
... 삐-약- ...... (흠- 안녕하신지?)
...... 삐 - 약 - ...... (흠- 안녕하지요....) ... 삐 -약 -... (난, 50원이지요. 흠-흠-)
"거, 고만 만져라."
병아리장수의한 소리에 소년은 그만 움찔하며 손을 거두어들인다.
보실보실한 노란 털의 감촉과 쪼그만 부리가 쪼아대는 느낌이 좋았다.
"만진 거 아니고요, 얘네들이 와서 닿았는데요?"
쭈빗쭈빗 변명을 늘어놓지만 이미 병아리장수의 째려보는 눈초리에얼굴은 이미 홍당무다.
"만지고 싶으면 돈 내고 사던가."
으- 아픈 곳을 찌르시는구먼요... ^^
그렇게 쉽게 살 것 같으면 매일 매일 병아리장수 앞에 쭈그려앉지도 않았겠다만...
그래도 조금만 더 구경하다 가야지 하고 마음 먹는 소년과 오래 서있던 구경꾼들을 병아리장수는 매정하게 물리쳤다.
"야야, 안살거면 모두 다 가라!"
소년은책상 위에 앉은 돼지저금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로 흔들고 부엌으로 달려간다.
저녁 준비에 바쁘신 엄마를 바라보다가 슬몃 부엌 안으로 들어선다.
"엄마, 뭐 도와줄 일 없을까?"
"그래, 잘 왔다. 저 쓰레기 좀 갖다버려라."
소년은 씩- 웃곤 냉큼 쓰레기 봉지를 들고 나간다.
잠시 후 다시 부엌으로 돌아와 하릴없이 주변을 맴도는소년을 보신 엄마가 물으신다.
"뭐, 할 이야기가 있니?"
옳지, 소년은 기다렸다는 듯이 엄마 앞으로얼굴을 디밀며 말을 꺼낸다.
"응, 그러니까 말이지..."
소년은 어떻게 말을 할지 망설이다가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나,한 주일에 하나씩 사주는 티나 크래커 있잖아?"
"그래, 있는데?"
"그거 이번 주에는 사주지 말고 돈으로 50원 주면 안될까?"
엄마의 입가에 미소가나타나자, 소년은 벌써 가능성을 감지했다.
"뭐 하려고?"
"아니, 그냥... 뭐 좀 꼭 사고 싶은게 있어서...헤헤"
다음날 소년은 병아리장수 손바락에 자랑스럽게 50원을떨어뜨려 주었다.
10원짜리 병아리 다섯마리.
병아리장수가 들어올린 네마리에, 다섯번째는 오늘도 구석에서 돌돌 떨며 졸고있는 녀석을 소년이 직접 들어올렸다.
그래, 너도 같이 가자. 내가 따뜻하게 해줄께.
다섯마리의 병아리가 담긴 조그마한 종이상자를 들고 집으로 오는 동안 소년은행복했다.
부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는 친구들 사이를 자랑스럽게 헤집고 나오며 매일같이 계란을 먹는 자신을 상상했다.
몇 년이 지났을 때 수 백 마리의 닭들이 점심 때만 되면 일제히 알을낳고, 그 많은 알들을 계란판에 부지런히 줏어담는 자신의 모습을그려보았다.
봄은 생각보다 쉽게 따뜻해지지 않았다.
소년의 방안 한 구석에서 밤낮 없이 삐약거리던 병아리들 덕분에 온 집안은 병아리똥 냄새로 진동했고 병아리들 소리 덕분에 밤잠을 설치는 사람도 있었다.
그 와중에 다섯번째 녀석은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버티다가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마당 한 구석에 잘 묻어주고 나무로 십자가까지 만들어 세워줬지만 소년의 마음은 많이 아팠다.
그녀석을 위하여 할 수 있던 일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년의 손 안에서 쪼그려 앉아 바르르르 떨면서 눈을 내리감는 그 녀석을 생각하며 그는소리내지 않고 울었다.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일요일, 소년은 병아리들을 마당으로 데리고 나갔다.
무슨 연유에선지 다섯번째 녀석이 하늘나라로 간 이후 나머지 녀석들도힘들어 했다.
따뜻한 햇볕을 받으면서 운동하면나아질거야...
보리박구에서 해방되어 마당에 내려진 병아리들은 낯설은 환경 탓인지 옹기종기 모여서 서로 부비며 햇볕 속에 서있었고 한 녀석은 앉은 채 졸고 있었다.
소년은 그들을 위하여맛있는 모이와 깨끗한 물을준비하여 내놓았다.
자, 어서들 먹고 기운 차려서 좀 움직여봐라.
결국 마당나들이는 병아리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된 것 같았다.
오히려 추위 먹은 듯,떠는 녀석들의 숫자만 더 늘어난 듯 싶었다.
그 날따라 소년은 청소당번이었고, 청소 후엔 이미 진행 중인 축구게임에 끼어들어 공을 차느라 유난히 귀가시간이 늦어졌다.
"엄마, 나 배고파!"
항상 하듯, 자신의 방문을 열고책가방을 던져놓고 돌아서던 소년은 멈칫했다.
보리박구가 없어졌다!
병아리들이없어졌다!
뭔가 불안한 기분이 소년에게 엄습했다.
소년을 맞으러 부엌에서 나오시던 엄마의 표정이 밝지 못하셨다.
마당 구석에 세웠던 작은 십자가는 다섯개로 늘어났다.
잘자거라, 병아리들아.
소년은 그들의 슬픈 영혼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했다.
아픔이 없는 하늘나라에서 그들이 잘 살게 해달라고.
몇 일이 지나지 않아, 마당에는 조그만 닭장이 들어섰다.
그리고 먼젓번보다 훨씬 건강하고 체구가 좋은 병아리들이 열 마리나 그 안에 있었다.
상심한 소년을 위로하기 위한 엄마의 선물이었다.
소년은 닭장 앞에 쪼그려 앉아 다시닭들과의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여름, 소년은 매일 7개의 따끈한 달걀을 손에 쥘 수 있었다.

(2009.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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