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목 윗목

우리말에 '목'이란 말이 있다.
가장 잘 쓰이는 용례는 '목이 좋다' 하는 표현으로, '목' 이란 '길목' 또는 '위치' 를 뜻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좋은 목, 좋은 자리, 끝내주는 자리, 명당자리(^^)......
우리 사는 방에도 '목'들이 있다.
온돌이 깔린 방에 아궁이에서 가까운 아랫목, 아궁이에서 멀어서 바닥이 찬 윗목, 그리고 아랫목 중에서도 가장 노란자위 부분, 불목이 있다.
윗목은 차다 못해 발이 시럽고, 불 잘드는 불목은 절절 끓다 못해 장판이 까맣게 타버리는 경우가 많았고, 혼자 차지하려고 불목 위에 앉으면 빨갛게 엉덩이에 화상을 입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조금 겸손하게, 불목 가장자리로 둘레둘레 자리한 아랫목, 거기가 바로 좋은 목, 좋은 자리, 끝내주는 자리, 그 방의 명당자리이다.
아랫목에는 두툼한 솜이불로 덮어놓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그 솜이불 속으로 발들은 집어넣고 재잘재잘 웃음꽃 피던 자리.
새로 방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에게 선뜻 옆으로 옆으로 궁뎅이를 옮겨서 따뜻한 자리를 양보해주던 정겨운 우리네 고유한 자리였다.
거기에 물고구마 뜨끈뜨끈하게 찐 것으로 한바구니 있으면, 누군가외출에서 돌아오면서 사오는 풀빵 한무더기 있으면, 뻥튀기 한 봉다리 있으면...... 방바닥에 궁뎅이가 눌어붙어도 하루는 줄겁게 흘러갔다.
호사다마(好事多魔) 라고 했던가?
이 엉덩이 따습고 즐거운 아랫목의 유희에도 때론 먹구름이 끼고, 윗목에서 밤새 얼어붙은 냉수그릇 보다도 더 차가운 기운이 서릴 때가 있었다.
물론 따져보면 대부분의 발단은 어린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었지만, 아랫목에 냉기가 서리기 시작하면 잘 놀던 사람들 하나 둘 슬금슬금 이런저런 핑계대며 방을 빠져나가고 만다.
아랫목에 웬 서릿발?
첫째의 경우는 나의 독특한 식습관에서 비롯되었다.
누구나 좋아하던 모리나가 캬라멜 또는 아무 캬라멜이던 좋았다.
그냥 먹었으면 아무 탈이 없었을텐데, 나는 유난을 떨어 꼭 아랫목 방바닥에 대고 짓눌러서동그랗고 납작하게 만드는 재형상화 과정을 거쳐야만 입 속으로 집어넣곤 했다.
그런데 그게 빠른 시간에끝낼 수 있는 작업이 아니었고 아랫목에 약 10 분 정도씩은 녹여야 그 모양을 만들 수 있는 정도의 점도가 되는데, 문제는 '잠시' 잊고 방치한경우(--;) 또는 누군가의 입장으로 작업 도중 이불을 다시 덮어놔두는 경우였다.
캬라멜이라는게 녹혀서 먹으면 참 부드럽고 달콤하기가 이를데 없는데, 이게 한 번 옷에 들어붙으면 대책이 없이 들어붙는, 나쁜 점을 가지고 있었다.
손님들의 당황스런 표정, 좁아지는 어머니의 미간, 원망스런 캬라멜과방 한 구석에 오도카니 세워놓은 빗자루를 번갈아 쳐다보던 나의 모습......--;;
또 한 가지의 경우는 늦게 집에 돌아오시는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 당시엔 지금의전기보온밥통이 없던 시절, 한 번 저녁밥을 지으면 늦게 들어오시는 아버지 진지를 따뜻하게 유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만 했다.
처음엔 진지를 퍼담은, 뚜껑 있는식기를 수건에 싸서 불목에 놓고 예의 솜이불을 덮어놓았다.
그리고 나중엔 식기 모양의 스치로폼으로 된보온통이 나와서, 거기에 식기를 담은 후 다시 솜이불을 덮었다. (누구 아이디언지...^^)
조금 덜 추운 날엔 아랫목 이불에 발 넣는 사람이 없어서 아버지 진지는 온전한 모습으로 늦은 상차림에 김을 뽀샤시 내면서 오를 수 있었다.
헌데, 조금 날씨가 추운 날엔......? --;
누군가의 발에 채여 뒤집히기 일쑤였고, 뒤집히기로 끝나기만 하면 참 다행이었을텐데, 이것이 어떤 때는 뚜껑까지 열려서 그 솜이불 밑에서 돌아다녔다.
이불 속에 넣은 발에 웬지 끈적함이 느껴지면...... 아, 이게 참...... 내용물과 식기와 식기 뚜껑 세가지가 다 따로따로 이불 밑을 뒹굴고 있는 상황이다.
이불을 뒤집어서 내용물과 식기를 원위치 시키고, 이불홑청에 들러붙은 밥풀들을 하나씩 둘씩 뜯어먹음으로써 끈적함을 제거해내는 것이 수습책이었고, 수습이 되기 전에 어머니께 들키면 바로 아랫목에 서릿발이 꼿히는 순간이 되는 것이고......
하여간, 나중에 보면 아버지 상에 오른 진지가 유난히 양이 적은 경우도 많았다. (죄송~^^)
아랫목에서는 때로 정말 견디기 어려운 냄새가 나기도 했다.
뭐, 꼭 누구누구의발냄새라든지, 보리방귀 냄새라든지,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먹고 즐기는 음식물에 의한 것이었다.
바로 퉁퉁장이 범인이었는데, 표준말로는 청국장,특히 충청도에서 겨울에 즐겨먹는 된장찌게의 한 종류이다.
메주콩을 삶아서 따뜻한 곳 (예를 들자면, 아랫목) 에서 한 3일 발효시키면 끈끈한 실 같은 것이 생기면서맛있는 퉁퉁장 재료가 탄생하는 것인데......
뭐, 핑계는 항상 내가 퉁퉁장을 좋아하므로내 방 아랫목을 이용한다는 것인데, 이제 지나고 생각해보면 나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식구가 여자들이었기 때문에 자기 방에서 퉁퉁장 띄우는 냄새가 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터......
끓이고 나면 먹기는 여자들이 더 잘 먹었던 것 같다.
하지만 겨울이 되면 시시때때로 내 방에서 피어오르던 퉁퉁장 띄우는 냄새는 방도 방이지만 입는 옷에도 스며 있었던 것 같다. --;
우리집에서 아랫목 윗목이 사라진 것은,아마도 우리가 온돌이 아닌 보일러식 난방을 하는 아파트로 이사하면서가 아닌가 싶다.
아랫목 이불에 발 넣고 있으면 궁뎅이와 발이 따뜻해지고, 궁뎅이와 발이 따뜻해지면 어깨와 등짝이 따뜻해지고 싶고, 그러다보면 점차 자세를 낮추면서 눕게 되고......zzz
한 때 우리 아버님, 아랫목 이불 때문에 모두가 게을러진다고 호통도 치시고 하셨지만, 따뜻한 아랫목에서 오고가던 정겨운 대화와 온기가 그리울 때가 종종 있다.
가족이라는 개념이 지금과는 많이 다르던 때의 이야기......
이곳엔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밤 사이수은주가 영상 10도 아래로 곤두박칠쳤다.
뜨거운 커피 한 잔에 두툼한 겉옷 하나 껴입으면서도 뜨끈한 아랫목 깔아놓은 솜이불 아래에서 궁뎅이 지져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지금쯤 공군회관 맞은편 붕어빵 아줌마도열심히 붕어빵을 뒤집고 있을텐데......^^

(2008.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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