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번 종이 울리는 날

살아가다 보면 인생이란 참 웃긴 짜장과도 같은 것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누가 특별히 그렇게 만들지도 않았음에도 우리는 모든 일에서 승자와 패자가 극명하게 갈리는 경주의 연속임을 잘 알고 있다.
어디에나 승자의 스토리만 존재하고 성공한 사람의 무용담만이 들려온다.
한 번이라도 금메달을 받아본 마라톤선수 보다 한 번도 무슨 메달도 받아보지 못한 선수들이 더 많은 법이고 싸운 숫자 만큼이나 패전의 숫자가 많은 권투선수도 있다.
심지어는 초등학교 가을운동회의 클라이막스라고 불리우는 청백계주에도 쓸쓸한 패자는 존재한다.
C라는 친구가 있었다.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신 덕분에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홀어머니와 함께 끼니를 걱정하며 살아야만 했지만 건강한 정신과 튼튼한 육체를 타고나 구김살이 없이 자라났다.
그의 어머니는 같은 학교 친구 G 의 집에 파출부로 일하면서 C의 뒷바라지를 하셨고, G의 어머니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땅 한 구석에 가건물을 짓고 살도록 배려해주셨다.
체격이 좋았던 이 친구, 먹성도 정신없이 좋아서 가방의 절반은 도시락이 차지할 정도였고 항상 "어이구, 배고파~" 하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다.
길을 가다가 우리 어머니가 멀리서 보일라 치면, 모든 것 팽개치고 정신없이 달려와 90도 구부려 인사를 하고선,
"어머니, 저 만두 좀 사주세요."
"돈 없다, 이 녀석아."
하시면서도, 어머니는 그를 위해 지갑을 열고 만두값을 꺼내 주시곤 했다.
그는 열심히 잘 먹고 나머지 시간엔 열심히 운동을 했다.
좀 미안한 이야기지만, 난 그가 책을 펼쳐놓고 자리에 앉은 모습을 본 적이 한번도 없다.
그는 항상 운동장에서 뜀박질을 하고, 씨름을 하고, 철봉을 하며 땀을 흘렸다.
"야, 너도 책 좀 봐라."
하고 놀리는 나에게, 그는 한 쪽 눈을 치켜 올리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쓰~, 그건 너의 길이고... 이 형님의 길은 운동이란다."
C는 체격이 좋고 여러가지 운동을 하다 보니 달리기는 기본으로 잘 하였다.
오학년이 되었을 때, 벌써 가을운동회 청백계주 마지막 주자는 그의 것으로 고정되었다.
여기서부터 그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피니쉬 테잎을 끝는 주인공으로 ......?
아니었다.
그에겐 운명의 경쟁자가 있었으니......
그것은다름아닌 자신의 가족을 위해 일자리와 거처를 제공해주는 친구 G.
부잣집 아들에, 반장에, 공부 잘 하는,소위 말하는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 의 조건을 두루 갖춘 G는 학처럼 긴 다리를 가진, 멋진 장거리달리기 선수였다.
우연찮게 둘의 체육시간이 겹치면, 선생님들도 둘을 불러 달리기경쟁을 시키고 즐길 정도로 둘의 실력은 막상막하였다.
오학년 가을운동회.
마지막 주자를 남겨놓고 청백계주는 반바퀴 정도로 벌어졌던 팀간 거리가 좁혀들고있었다.
청군의 마지막 주자 C, 그리고 백군의 마지막 주자 G.
C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인상을 찌푸린 채 앞 주자가 달려오길 기다리다 마침내 바통을 이어받아 뛰기 시작했는데... 평시의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
절룸거리는 것도 아니고, 땅을 박차는 모습도 강하지 않은... 어딘가 이상했다.
힘들게 들어오는 앞 주자를 보다 못한 G는 근 20여 미터 앞으로 마중 나가 바통을 넘겨 받은 후, 긴 다리를 이용해, 그야말로 파파팟 하는 소리로 땅을 박차며 달려나갔고모두는 마지막응원의함성을 질렸다.
둘 간의 거리가 차츰 좁아들었고, 역전 가능성의 냄새를 맡은운동장은 흥분의 도가니로 변해갔다.
고통스런 표정으로 이를 악물며 달리는 C가 마지막 직선주로에 들어섰을 때, 그는 자신의등에 쏟아지는 G의 가쁜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학생과 선생님과 학부모들을 흥분하여 스탠드에서일어서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20 미터... 10 미터...
그리고 그는그 때G의 어깨가 자신의 어깨 앞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았다.
골인.
G가 역전하여 테이프를 끊으며 골인선을 통과하였고 C는 두발짝차이로골인하였다.
흥분한 학생들이 G를 무등 태운채운동장을 돌았고, 백군의 응원가가 하늘 높이 울려퍼졌다.
청군은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망연자실해있었다.
운동장 한 켠에서 C가 고통스런 표정으로 운동화를 벗고 있었다.
"왜 그래? 괜찮냐?"
그의 하얀 양말의 한 부분이 빨간 피로 물들어 있었다.
"쓰~, 어제 축구하다 엄지 발톱이 빠져버렸네..."
"아프면 뛰질 말지 그랬어?"
"쓰~, 나 대신 뛸 사람이 있데? 부축이나 해주라"
단상에선 백군의 마지막 주자 G가 대표로 우승기를 받고 있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C의 무게를 한 쪽 어깨로 느끼며 우리는 양호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시 한 번큰 소리로 백군의 우승을 선언하는 교장선생님과 이에 환호하는 학생들의 함성.
그리고 C에게 쏟아지는 청군의 따가운 눈초리를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가을운동회.
작년과 같은 드라마틱한 승부를 맛보기엔 청백계주의 진행이 너무 단조로웠다.
청군의 마지막 주자 C와 백군의 마지막 주자 G가 바통을 받았을 때, 청군은 약 10여 미터 앞선 상태였고 그들이 거의 골인 지점에 이르렀을 때의 간격은 아직도 최소 5 미터 이상은 유지되고 있었다.
이미 결정난 승부에 속도를 줄이며 골인선에 뛰어드는 C에게, 심판위원장 교무주임 선생님이 소리지르며 팔을 들어 허공에 돌려댔다.
"한 바퀴 더!"
한 바퀴 더 라니...
C는 정신을 퍼뜩 차리고 다시 바통을 움켜잡고 힘껏 달리기 시작했고, G가 그 순간을 이용하여 C의 등뒤로 바짝 다가서자 운동장은 다시 한 번 흥분하기 시작했다.
예정에도 없는 한 바퀴를 더 돌라는게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운동장을 반바퀴쯤 돌았을 때, G는 C와 어깨를 나란히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장거리 달리기가 특기인 G는 C를 젓혀내고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지난 해에 이은, 또 한 번의 역전으로 가을운동회의 흥행은 또 한 번의 대성공이었다.
다만 주최측의 농간으로 승자와 패자의 위치가 바뀐 채로......
우리편 선생님들은 심판위원장에게 항의 한 번 하지 않은 채로 운동회는 마감되었다.
역전의 명수로 떠오른 G는 다시 한 번 줏가를 날리고, 다 이긴 승리를 어이없게 날려버린 C는 씁쓸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앉아서 물만 연방 들이켰다.
"야, 네가 이긴거야."
"쓰~, 교무주임 XX놈."
"쓰~, 난 암만해도 이름을 잘못 지으신 모양이야."
인천에 있는 체육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찾아온 그는 발고랑내 나는 양말을 벗어서 털어대며 말했다.
"발 닦고 와, 임마. 멀쩡한 이름은 왜 걸고 넘어가?"
"쓰~, 뜻이 종을 아홉번 치라는 건데, 왜 열 번이 아니고 아홉번 치라고 지으셨을까?"
세숫대야에 발을 담그며 심각한 표정으로 그가 물었다.
"불교에서는 아홉 이라는 숫자가 좋으거래잖아. 그리고 화투 섯다에서도 갑오(아홉끗)가 최고잖아?"
잘 모르는 내가 일단은 이런 저런 경우로 둘러 막으며 수건을 건네 준다.
"쓰~, 그런가? 내 인생에 아홉번 종이 울리는 날이 올까?"
"네가 이만큼 살고 있는 것 자체가 아홉번 종 울리면서 살고 있는거 아니냐?"
"쓰~, 짜식이 말은 잘 해요~."
하지만 속으로 난 진정으로 그의 인생에 종이 아홉번 울리는 날이 오기를 기원했다.
"쓰, 난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 내 그걸 증명해보이겠어."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세상에 뛰어들어 미친 듯이 일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있는 한 시간 한 시간이 너무나 아까운듯 쪼개어 아껴쓰면서...
그리고 어느날 불의의 사고로 그가 세상을 일찍 떠났음을 멀리서 전해 들었을 때, 나는 다시 한 번 그의 빛나는 감투정신에 목이 메었다.
그가 하늘에 오르던 날, 하늘에선 틀림없이 종을 아홉번 울려주었을 것이라고 믿어마지 않는다.
열심히 그리고 최선을 다해 산 그에게 승자의 손을 들어주지 않은 세상이 안타까울 뿐이다.
아마도 그는 지금 이곳을 내려다 보며 이렇게 이야기 할 지도 모르겠다.
"쓰~, 열심히 살았던 내가 여기서는 승자라네."
잘 지내나, 친구?

(2009.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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