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몸이 되올찐대 무어시 될꼬한이
崑崙산 상상봉에 낙낙장송 되얏다가
群山에 雪滿하거든 홀로 웃둑할이라
(권 필)
이 몸이 되고 싶다면, 무엇이 되고 싶은고 하니
저 높은 곤륜산 상상봉 꼭대기의 한그루 소나무되어
여러 산들이 눈에 파묻혔을 때 홀로 우뚝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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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낮 우리 동네 수은주가 마침내 33도를 넘어섰다.
1953년 이래 7월 8일 날씨로는 최고의 더위였다고 한다.
다행히 습도가 0 였던지라, 뜨겁긴 해도 사람이 처지진 않으니 그래도 살만은 하다.
아이들과 함께 포장지에 'Fruit Bars' 라고 쓰인 딸기 아이스께끼를 빨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도 핸들을 잡은 팔뚝이 햇볕에 따끔따끔 거린다.
얼레? 안에 딸기 덩어리도 씹히네? ^^
하도 덥길래 시조도 눈(雪)이 들어간 것으로 골라보았다.
......
1974년은 아마도 우리네 악동들에겐 최고의 해가 아니었나 싶다.
특히나 군것질을 좋아하던 무길도한량에게는 말이다.
그 해 겨울, 거리는 온통 처음 출시되는 프리미움급 항아리 아이스크림 빙그레 '투게더'와 하얀 아이스크림 위에 고소한 누가가 덮인 해태 '누가바' 의 열풍(아, 이럴땐 냉풍이 맞나? ^^) 으로 뒤덮여 버렸다.
이제까지의 1세대 석빙고 아이스께끼나 2세대 부라보콘과는 확실히 다른, 명실상부한 3세대 아이스크림의 선두주자들의 등장은 무길도한량의 삶에도 심오한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자면,
엄마, 나 께끼 하나만...
하고 조르던 그는, 투게더의 비싼 가격 탓에 그저 엄마의 관대한 처분만 기다리는 순종형으로 변해갔다.
더더욱 중요한 것은 한방울이라도 흐를까 할딱할딱 부라보콘의 주변머리를 핥던 시절은 가고, 드디어 아이스크림을 밥숟가락으로 퍼먹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었다.
또 당시 용돈을 받던 막내고모와 누나의 군것질 심부름을 하면서 곁다리로 그의 몫도 챙기는, 자력갱생의 길을 개척하게 만들었다.
고모하고 누나하고 나하고 누가바 하나씩...150원.
또는 둘이 인디언밥 하나씩 할 때 난 누가바 하나.
물론 가끔 심부름값이 비싸다고 생각한 고모와 누나가 하교길에 자기네 것들만 사오는 비열한 짓도 하긴 했지만, 그래도 deal 자체는 상당히 상호간 합리적이지 않았나 싶다.
투게더와 누가바 뿐만이 아니었다.
유달리 그 해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먹거리들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왔다.
(촉촉해요) 오리온 쵸코파이도 나오고, 해태 에이스크래커 (오, 이거 없인 커피맛 꽝이었다)도 진한 우유맛을 품고 나타났고, 이상한 단지속에 든 노오란 빙그레 바나나맛 우유도 나왔다.
아아... 먹는 것 이야기를 하니 혈당치가 마구 올라감을 느낀다. ^^
시원한 아이스크림 이야기 하다가 엉뚱한데로 빠졌네... --;
갑자기 비싸진 아이스크림값 아끼려고 냉동실 마다 어머니는 스노우 샤벳을 밥공기니 국그릇이니 가리지 않고 가득가득 채워 얼리시던 모습도 선하다.
냉장실엔 물통마다 구수한 미숫가루를 걸죽하게 풀어 얼음을 띄워놓고...
시골 할아버지댁 깊은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퍼올린 차디찬 물을 머리꼭대기에서부터 쏟아부으면, 머리꼭대기에서부터 바로 한도막 얼음덩어리가 되던 그날들을 생각해본다.
그땐 뜨끈뜨끈한 컴퓨터 앞에 앉을 필요도 없던 때였다. ^^
후끈한 공기를 돌려대느라 선풍기 소리가 묵직하니 들려온다.
(2010.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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