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오십부터래...

인생은 오십부터래... ^^

2011년 7월 15일 금요일

종로엘레지


종로엘레지







보신각 골목길을 돌아서 나올 때는
찢어버린 편지에는 한숨이 흘렀다
마로니에 잎이 나부끼는
이 거리에 버린 담배는
내 맘 같이 그대 맘 같이
꺼지지 않더라

(서울야곡/현인)

1950년 레코딩된서울야곡은 1절은충무로, 2절은 종로, 3절은 명동거리에 빗물처럼 아롱진 서민들의 애환을 담아낸 명곡으로, 나중에 전영이란 가수가 멋지게 리바이벌하기도 했지만, 역시 조금 더듬듯 꺾어지는듯리듬을 탄 오리지널 현인선생의 노래가 제맛이 아닌가 싶다.

화신백화점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초현대식의 국세청 건물이 들어섰다는소식 이후론, 온통복원된 청계천쪽으로 시선을 빼앗긴 탓에종로가 마치 잊혀진 거리 마냥 소외되는 듯도 싶지만, 종로거리에 넉넉히 흐르던 꿈과 사랑과 정열은 여전하리라 믿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70년대와 80년대를,종로 보도블럭이 빤질빤질 해지도록 드나들었던 까닭에 아직도 '종로'하면 가슴이 먼저 뛰는... 아스라한 기억들이 내 마음 한켠에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왜 우리는 종로로 종로로 모여들었을까?

학생들이 종로를 처음 가게 된 원인들 중 가장 큰 것은 역시 학원들이었을 것이다.
지금이야 노량진이 학원가로 유명하지만, 80년대 초반 사교육 금지령으로 학원들이 종로에서 쫓겨나기 전까지는 당시유명하다는 단과전문 입시학원들과 일부 종합반 위주의 재수학원들이 모두 종로2가 중심으로 모여있었다.
대일, 제일, 경복, 종로... 등등 수 많은 학원에 수 많은 현역 및 재수생이 몰려들었던 탓에 종각 지하철역으로 통하는 지하보도들은 항상 인산인해를 이루어, 잘못 물결을 탔다가는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 상관없는 쪽으로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 물결을 헤치며 거슬러 가는 용감한 학생의 모습에서, 세계 속에서 경쟁력있는 대한국인의 모습을 상상했다면 지나친 비약인지 모르나, 하여간 그것은 보통사람이 엄두를 내기도 힘든 역경이었고,때로는 그런 악받침도 요구되었다.

유명한 강사들의 강의를 듣기 위하여 꼭두새벽부터 줄을 서기도 하고, 한 클래스에 6백, 8백명 되는 강의 속에 파묻혀,이유없는 경쟁심도올려보고, 분명 강의실에 들어온 것은 기억나는데 정신차려 보면 어느새 강의는 끝나있고...
학원에서 나눠준 츄리닝 잠바를 입고 흰장갑을 낀채 칠판지우개로 커다란 호를 그리며 칠판을 말끔히 지워나가는 '지도원'들은 강의를 공짜로 듣는다는이야기 때문에, 그들을 부러워하기도 하고...(사실 그들은 대부분 재수생들이었다)
고3 때, 재학생 과외 및학원수강 금지령을 접한 것도 다음달 학원증을 끊기 위하여나래비 서있던 줄 속에서 였다.

이들의 틈바구니에 섞여 있으면 스스로 뒤처지지 않고 있다는, 말도 않되는 나름대로의 위안이 있었다.
물론 그것이 내겐 실제 성적과는 하등 무관한 일로나중에 나타났지만 말이다.--;

당시 우리 학교는 방과 후 보충수업 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싫어하는 것으로유명하여 항상 국민학생들처럼3시 20분 정도면학교가 끝났고, 자율적으로 남아서 혼자 공부하는 것도 반기지 않던 까닭에 4시가 넘어서면 어두컴컴한 건물 내에는 정적만이 맴돌곤 했다.
일단 따르르릉 하고 수업종료 벨만 울리면, 선생님이건 학생들이건 가릴 것 없이 대엑소더스의 물결처럼 그 동네를 빠져 나가버렸다.

그러면, 어디로 가야 하나? --;;
우리에겐 다행스럽게도 정문 앞에 기사와 함께 자가용처럼 항시 출발 5분전의 자세로 대기하고 있는,수유리 화계사까지 가는 84번 동아운수 버스가 있었다.
칼라 세운 까만 기지에 금빛 단추가 달린 교복이든, 초록빛 머플러에 번쩍이는 버클 단 교련복이든 어깨 위 먼지 좀 떨어내고, 쓰고 있던 정모를 벗어서 교복을 살살 문지르면 교복은 먼지끼 하나 없이 반지르르 광택이 나기 시작한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나갈 터인데, 뿌연 먼지 뒤집어쓴 검은돌마을 촌티를 낼 수는 없잖은가.
구두의 먼지까지 싹싹 종아리에 문지르고 나면, 자 이제호기롭게 84번을 올라탄다. 
가자!종로로!!! ^^

학원 강의 시작은 6시 하고도 30분.
두어 시간 정도 남은 시간을 어느 길바닥에서 보내야 하는가?
종로에는 답이 있었다. ^^
종로에 들어서면서, 84번 버스의 첫번째 정류장은 종로서적 앞이요, 두번째 정류장은 단성사, 피카디리 앞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수 천, 수 만의 장서가 공짜로, 밝은 조명 아래, 누구도 뭐라 하지 않고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준 종로서적은 그야말로 천국같은 존재였다.
(정부에선 이런 공익성, 선행성 기업을 찾아 표창이라도 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 알게 모르게 종로서적의 덕을 보고 자라난학생들이 얼마나 많을지...) ^^
서가에 기대어 선 상태로 기-냥 읽다보면 두어 시간 정도의 시간은 항상 부족했다.
왜 그리 탐나는 책들은 또많았는지...... ^^
읽어도 읽어도 쏟아져 나오는 신간들을 다 소화해낼 수가 없었다.

지식을 살찌게 하는 것 이외에, 독서의또 한가지 좋은 점은 소화에 있다.
무엇을 먹었던지 간에 두어 시간 책을 집중하여 읽다보면 (예쁜 여학생이 있으면 훔쳐도 보면서) 뱃속에선 벌써 자지러지는 듯한 고동을 불기 시작한다.
자, 그러면 미련을 버리고 책을 가지런히 다시 꽂아준 후 그곳을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또 다른 즐거움, 이름하여 피맛골이 우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

핏맛골이란, 조선시대 종로통으로 고관대작들이 말을 타고 지나가면, 그 말이 다 지나갈 때까지 평민들은 엎드려 있어야 했기 때문에, 이같은 말을 피하는(避馬)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 평민들은 종로통 뒷골목길을 이용했는데, 이것이 현재 위치로 교보문고 뒷쪽에서부터 종로6가 끝까지 이어졌다.
70년대에만 해도 피맛골엔 주로, 종로큰길에 어울리지 않는저가의 서민 식당, 술집, 다방, 구멍가게, 간혹가다살림집 등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두어 사람이 나란히 걸어갈 수 있을만한 폭의 골목엔 국밥집, 분식집뿐만 아니라 막걸리 파는 왕대폿집도 있었고 오락실, 실내야구장도 있었다.

이제 막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는 피맛골 여기저기선 벌써 막걸리 냄새가 물씬 풍겨나오기도 하고, 그 좁은 골목길에 쭈그려 앉아 풍로불에 구워대는 생선 냄새, 철판에 기름 두르고 부쳐내는 파전, 빈대떡 냄새로 배고픈 사람은 도저히 10m 전진이 불가능한, 그런 곳이었다.
학생들이 주로 많이 가는 곳은 우미관 근처의 분식집들로 라면, 떡볶이, 오뎅, 만두 그리고 분위기에 어울리진 않지만 맛있는, 도너츠나 고로깨 같은 것들이 주메뉴들이었다.
집집마다 다 특색이 있고 저마다 조금씩 다른 맛으로 인기를 끌었지만, 가장 인기있는 곳은 양 많고 값싼 곳들이었다.
특히오래된 개밥그릇 마냥다 쭈그러진 양은냄비에 끓여내오는 떡라면의 맛은 집에 와서 암만 흉내를 내봐도 흉내낼 수 없는 별미였다.

분식집 들어가기에 주머니 사정이 조금 여의치 않으면 길거리 리어카에서 만들어 파는 토스트도 괜찮았다.
계란을 풀고 그 위에 채 썬 약간 양의 야채를 올려서 오믈렛 만들듯이 계란을 후라이한 후,버터에 구운 토스트빵 위에 그것을 올리고 설탕을 휘-뿌린 후 반으로 접어주는 것인데, 그 맛이 또 어디가도 뒤처지지 않는 달콤함에 뜨끈함에 고소함으로 겨울간식으로 제격이었다.
단 하나 주의할 점은, 모든 포장마차 음식이 그러하듯이 멋모르고 두어 개 먹었다간, 차라리 김치 얹은 떡라면 한그릇 가격보다 더 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
하지만, 분식집이고 토스트 리어카고 간에 종로 특성상 돈 대신 버스회수권도 받아주었으니, 용돈은 적고 회수권 지급은 풍족했던 나로서는 이용하기 좋은 장소들이었다.

요기를 하고 나서도 시간이 조금 남아있으면 실내야구장에 가서 야구방망이 몇 번 휘두르는 것도 괜찮고, 오락실에 가서 집중하여 갤러그니, 블럭격파니, 뽀글뽀글이니, 너구리니 하는초기 전자오락게임들을 하는 것도 괜찮았지만, 항상 시간에 유의해야 하는 것이 조그마한 걸림돌이라고나 할까? ^^

종로 이야기를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는 고전음악감상실 '르네상스' 이다.
'쉘부르' 니 '디 쉐네' 니 말로만 듣던 고전음악 감상실들은 이미 어디로 숨었는지 없었고, '르네상스' 만이 명동의 '필하모니'와 함꼐 고전음악의 명맥을 쓸쓸히 잇고 있었다.
언제 붙여놓았는지도 모를 포스터는 담배연기에 누렇게 찌들었고 맛 없는 커피를 두 모금 담고 있는 커피잔의 이빨은 나갔어도, 오래된 스피커에서 뿜어져 나오던 그 클래식 음악은 정말 클래식 다웠다.
가끔 하릴없이 들러보면 나와 마찬가지로 하릴없이 앉아서 커피와 담배만 축내면서 두 눈을 지긋이 감고 음악에 취해있는 젊은이들이 몇몇 있을 뿐이었다.
재미있던 것은 '르네상스'는 4층에 위치하여 클래식만 틀었고, 2층에는 Rock 다방이, 3층에는 Light Pop 다방이 같이 존재하였다는 사실...
담배연기 자욱하기론 Rock 을 틀던 2층 다방이 제일 심하지 않았나 싶다. ^^

주말에도 피 끓는 젊은이들은 역시 종로로 가야만 했다.
우선 종로에는 충무로 대한극장, 을지로 국도극장, 광화문 국제극장와 더불어 1류 개봉관으로 손꼽히던 단성사와 피카디리극장이 있어서 좋은 영화를 대할 기회가 많았을 뿐더러 피카디리극장 바로 앞에 위치한 2층 커피숖에서 개봉영화를 보러온 사람들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뭐, 가끔 나타나는 교외단속반과의 숨바꼭질도 벌어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보고 싶은 영화는알게 모르게 사실상 얼마든지볼 수 있었다.

그리고 대학에 올라가서는 자연스럽게, 보신각 뒷쪽의 '반줄' 이니 '1과 1/2' 이니 하는 경양식집에서 미팅들이 많이 이루어진 관계로 한동안은 역시 종로를 가지 않을 수 없었다. ^^
데모가 심할 때면 숱하게 많이 검문을 받고 책가방 수색을 받으며 기분 나빠 하여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로에는 우리를 이끄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종로라는 곳이우리가 놀았기에 익숙한 동네였으며 또는 여기저기 흩어져버린 친구들을 모으기에 좋은 중심지였기 때문에 우리의 맘이 항상 그곳을 떠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그곳에서 마치 승천을 기다리는 용들처럼 또아리를 틀고 앉아 지내던 곳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질풍노도와 같이 끓어오르던 거친 숨을 고르며 깊고 어두컴컴한 골목사이에서 바깥 세상을 올려다보던 그 시절을 보낸 장소라는 점이다.

다 큰 어른이 된 지금도 누군가가,
"어, 종로에 가서 한 잔 할까?"
하면 만사 제쳐놓고 다시 피맛골의 대폿집으로, 니나노집으로 기어드는 것은 그곳의 그 냄새, 그모습, 그 정취가우리의가슴 속 어딘가에 지워질 수 없을 만큼이나 깊숙하게 뿌리를 내려준 때문일 것이다.

내 맘 같이 그대 맘 같이
꺼지지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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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1)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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