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오십부터래...

인생은 오십부터래... ^^

2011년 7월 20일 수요일

맞선보는 날

맞선보는 날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온산과 강과 하늘이 일어나 축복의 빛을 발하여 주었던가?
그날이 오면, 온 집안의 식구들과 이웃들이두손 흔들며 장도에 오르는 이의 무운을 빌어주었던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날도 분명 어느 곳엔 해가 둥실 떠올랐을테고, 또 어느 곳엔 잔뜩 찌푸린 회색 하늘에 봄비가 오락가락 했을것이다. 
포도는 간밤에 불던 바람에 떨어진 벚꽃들로 하얗게 덮이고...
한 사람의, 아니 두 사람의 미래가, 아니 한 가족의... 아니지, 더 크게 보면 세계의 역사가 달라질 수 있는 그 만남의 날에 대한 기대는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 같다.

등 떠밀려서...
때가 되었으므로...
심지어는, 부모님의 걱정을 덜어드리기 위해...
더 심한 경우엔, 그날 특별히 지급받는 격려비를 착복하기 위해... ^^
우리는 내키지 않는 표정을 하고 느릿느릿한 발걸음으로 만남의 장소로 향하곤 했다.
아침부터 목소리 높아진부모님들의 성화에 마음이 상하여 입술만 쭉 나온 상태로 씨근덕거리며 간 적도 있지 않았던가? 

인생무상도 튀어나오고, 별로 신경 안쓰던 결혼무용론이란 단어도 아물거리고...
어젯밤 회식에서 마신 술이 제대로 다 깨기도 전의 풀린 두눈에다 푸석푸석하게 부어버린 얼굴엔 안주로 먹었던 돼지감자탕의 얼큰함 마저 배어나오는 듯 싶다.
오늘따라 매고나온 넥타이는 왜 이렇게 마음에 안드는지, 양복이 왜 이렇게 불편하게 온몸을 휘감는지, 신고나온 구두가 분명 내것이 맞긴 맞는지..
모든 것이 어색하기만 하고 못마땅한이유는 정작 따로 있음을 알면서도 그것은 받아들이기싫은 현실일 뿐이었다.

"얘, 너 내일 선보기로 했다."
이미 몇일 전 중간에서 '뚜쟁이' 역할을하는 아주머니가 '좋은 처녀 있는데 선 한 번볼래?' 하는말을꺼낸 순간부터, 이 날이 올것을 99.99% 확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통보말씀에 이유없이 짜증이 났다.
왜 그럴까?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반응에 의아해하며 스스로를 달래보기 시작한다.
그러길래 연애 좀 잘해서 스스로 조달하면 되잖아.
연애가 아니라면, 어차피 누구나 겪어야 하는 길인데...

처음부터 여자가 없든지, 여자를 사귀다가 실패를 했든지, 결혼적령기가 되어서 곁에 결혼상대자가 없다는 것은 어차피 마찬가지.
그는 자기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남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삶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 자체에 알량한 자존심이 흔들리고 있는거였다.
그래도 나름 여자 조달능력도 있어서 때론 친구들을 위하여 미팅도 주선해주고 했는데, 이제 정작 때가 되니 제머리를 못깍다니...
분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사실 이번이 처음 선보는 것도 아니었고, 그래도 그동안 자존심 죽여가며 열 댓번은 보았다.
이미 경험이 쌓이고 노하우가 생겨서 그런지 몰라도, 이젠 선보는 것에 대한 긴장감이나 어색함도전혀 없고, 한 5분만 지나면상대방에 대하여어떤감이 왔다.
아~ 그래. 그대는 그런 사람.
그래서 면접담당자들이 그 짧은 면접시간을 가지고도 자기네가 필요한 사람들을 골라낼 수 있는지도 이해가 될것 같았다.
단지 맞선은 횟수가 늘어감에 따라 점점 자존심에 주는 상처가 깊어진다는 차이가 있을 뿐...
이번이 마지막이야... 하고 어금니를 앙다물며 결심을 해본다.
아버지로부터 아침에 받은 격려비가 바지 뒷주머니 속에서 툭툭!치며 그를 격려한다.

요즘의 판도는 어떻게 변했는지 몰라도, 옛날엔 시청앞 플라자호텔, 코리아나호텔, 그리고 강남고속터미널 근처 팔레스호텔 2층 커피숖들이 맞선 장소로 유명한 곳들이었다.
특히 토요일 오후엔 어디 앉아 커피 마실 수도 없을 만큼 북적대곤 했는데, 이 호텔 커피숖들이맞선장소로 잘 이용되던 이유는 주로 중간에서 다리를 놓는 사람들의 연령층과 관계가 깊은 듯 하다.
게다가 잘 성사되는 곳이 따로 있다는 미신 아닌 미신도 있었고...
하긴, 요즘처럼 이혼 많이 하는 때엔 그도 믿을 바 전혀 못되겠다만... ^^

엽차나 얼음 띄운 물 한잔 앞에 두고 정장 쪼옥 차려입고 자세가 흔들리지 않게 단정히 앉아있는 젊은 신사 숙녀분들의 모습들을 보면, 그들이 왜 여기에 왔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오우~, 거기 계신 분은 처음이신가봐? ^^
다행히 중간에 다리를 놓은 사람과 함께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좀 형편이 나았지만, 대부분의 선남선녀의 얼굴엔 긴장의 빛이 역력했다.
한 번의 선택에 평생이 달려있기에 긴장하지않을 수가 없다.

작은 팻말에 매직펜으로,알아보기도 힘들 만큼 조그맣게 이름 세글자를 쓰고, 딸랑 딸랑하는 방울을 달아 호텔직원이 우아하게 흔들며 지나가면, 혹 자신의 이름인가 하여 짐짓 몸을 비스듬히 하며 빠른 눈빛으로 확인하는 사람들...
어떤 곳에서는 입구에서 직원이 마이크로 아예 중계방송을 하는 곳도 있었다.
"흑석동에서 오신 김 아무개씨, 손님 오셨습니다."
"하월곡동에서 오신박 아무개씨, 카운터에 전화 있습니다."
이런 것은 그런대로 들어줄만 하지만, 이런 식으로 어나운스하는 직원도 있었다.
"장위동에서 오신 이 아무개씨, 면횝니다."
면회?
아마도 이사람은 하얀집에서 근무하던 경험이 있었던 모양이다. ^^

하여간 이럴 때, 동명이인이 있는 경우엔 좀 당황스런 상황이 나오기도 한다.
"제가 홍길동인데요...?"
"왕십리에서 선 보러 온 홍길동씨세요?"
"어? 아닌데요. 전 봉천동에서 온 홍길동인데요."
머쓱거리는 봉천동 홍길동을 지나 가슴을 쭈욱 펴며 나서는 다른 한 젊은이.
"아, 제가 왕십리에서 온 홍길동입니다만..."
선택되어진 자의 미소가 그의 말끔히 면도한 얼굴 위로 한 번유유히 흐른다.

이미 경험이 풍부한 그는 카운터에 명함을 한 장 주며 찾아오는 손님을조용히 자신의 테이블로 안내해줄 것을 부탁하여 놓았다.
그는 이제 그들이 들고나오는 팻말에도, 또는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멘트에도 신경쓰지않고 조용히 커피를즐기며 다른 사람들의 맞선보는 모습들을 즐길 것이다.
이 여유로움. 
역시 경험은 소중한 것이여... ^^

낯선 사람과 마주 앉아 커피 몇 번 홀짝 대다가 '우리 인제 자리 좀 옮기죠' 하는 결정과 함께 쭈빗쭈빗 일어서는 커플들.
거기엔 때로 만족스러움이 배어나오는 미소도 있고, 전혀 아니다 싶은디... 하는 당황함도 보이고, 인젠 뭐하나 하는 초짜들의기대 반어색함 반의 표정도 스쳐간다. 
저 커플은 잘 될것 같구만...?
에궁~. 저 커플은 카운터 계산 끝나면 갈길이 다르겠구... 쯧쯧. 남자가 여자성에 안차는구만.
그의 눈에 비쳐지는 모습들로 판단하면 성공확율은 20%도 안될 것 같아 보였다.
그러니까 재수, 삼수, 십수생도 있는거겠지?

"실례합니다."
한 낭낭한 목소리가 이런 저런 상상에 빠져 있는 그를 깨웠다.
이크크. 이거 졸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네.
근본에 졸길 잘하는 그인지라, 좀 전의 상상의 시간이 꿈이었는지, 아님 진짜 상상이었는지 가늠을 못하고 그만 허둥지둥 당황하며 어리버리한 모습을 상대에게 보이고 있었다.
원 포인트 마이너스.
"아, 안녕하세요?"
그녀를 맞이하려고 벌떡 일어나려 했으나 의자가 뒤로 밀리지 않는 바람에 그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거의 테이블 위로 쏟아지듯 인사를 한다.
마이너스 투. 오늘은 느낌이 안좋은데...?


가벼운 목례를 하고 맞은편 의자에 가서 앉는 여자는 화장이 화사하고 고급 브랜드 옷으로 차려입은 여자대학교 4학년생.
매우 짧은 순간에 그의 컴퓨터는 상대방을 스캔하고 자료를 분석해낸다.
성격 급함. 자존심 강함. 고집 셈... 
그의 컴퓨터가 돌아가고 있는 순간 상대방의 컴퓨터도 번개처럼 자신을 분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슬몃 웃음으로 자신을 회복하려 애쓰며 대화를시작한다.

이야기가 한동안 서로의 호구조사와 개인적 취향에 머물고 있을 때, 그는 두어 테이블 건너에 앉아 이쪽으로 유심하게 쳐다보던 한 여자와 눈을 마주치고 만다.
어디서 보았더라?
씽긋 웃음을 던지는 그녀도 역시 한 남자와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누구였지?
자꾸 다른 테이블로 시선을 던지는 그를 느꼈는지, 그의 맞선 상대가 마침내 고개를 돌려 예의 그 여자쪽을 흘낏 쳐다본다.
아, 이런... 마이너스 쓰리. --;;

아니나 다를까.
그의 상대는 핸드백을 집어들고 냉큼 일어선다.
"실례했습니다."
짧은 인사와 함께 그에게 설명할 기회도 안주고 총총히 나가버리는 그녀에 그는 당황한다.
아, 이런...
맞선 10분만에 보기좋게 딱지를 맞아버렸다.
'뚜' 아주머니에겐 또 뭐라고 변명을 한다지?
멀리서 피식 피식 웃는 사람들도 느껴지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나저나 저 여자 진짜 누구야?

그녀도 상대와 함께 일어서서 커피숖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상대가 돌아서는 짧은 순간을 이용하여 테이블 위에 있는 물잔을 들어올려 그를 향해 살짝 윙크를 하며 건배를 하는 듯한 제스쳐을 취했다.
아! 건배!
그제서야 그는 그녀를 기억해내기 시작했다.

지난 여름, 그는 그녀와 맞선을 보았다.
그녀는 결혼상대 물색이라는 본래의 취지와 아무 상관없이 선보기를 즐기는, 한마디로 '꾼' 이었다.
무남독녀 외딸이 시집 안간다는소리를 할까봐, 아버지는 선 한 번 볼 때마다 빠닥빠닥한 수표 한 장씩을 그녀에게 주었고, 그녀는 그렇게 선을 보며 용돈을 벌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은 미래를 위해 투자하고 있다고 했다.
신림동 어딘가 다락방에서 고시공부를 하느라 틀어박혀 있는 남자친구에게...

"자, 우리 10분만 있다가 합의이별 하는거예요."
"에, 뭐, 그럽시다. 시간도 아까운데..."
그녀는 시원하게 거품이 얹힌 노오란 칼스배드 맥주 두 잔을 주문했다.
"자, 바쁘신 와중에도 선보러 나와준 그대를 위하여, 건배!"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그대의 남자친구를 위하여, 건배!"
더 이상 그녀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맛있게 맥주잔을 비웠다.

지금쯤 그는유명한 법률회사의 변호사가 되었을까, 아니면 대쪽같은 판사가 되었을까?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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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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