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책가방

그땐 모두가 '책보'를 메던 시절이었다.
햇빛에 바래 누렇게 변한 광목을 사각형으로 크게 찢어내 책들을 놓고 대각선으로 둘둘 말아서, 비닐포장된 유가사탕처럼 양쪽으로 끄트머리가 길게 나오게 만들었다.
그리고 각자 취향에 따라 한쪽 어깨 너머로 둘러메고 가슴 앞에서 묶어주든지, 아니면 허리춤에 혁대처럼 두르고 배꼽에서 묶어주든지 하여 학교를 다녔다.
가끔 도회물 조금 먹은 아이들이 색깔있는 보자기로 책보를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뒷손가락질 받고 싶어 안달이 난 계집애들의 봄바람 같은 짓이었고, 간혹 흰 광목도 구하기 힘든 아이들은 미국원조 밀가루 푸대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오후가 되면, 까까머리 남자아이들과 짧은 단발머리를 만든 여자아이들은 일제히 등에, 허리에 하나씩 둘러메고 교문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흔들리는 책보 속에서 내일의 꿈과 소망이 덩그렁거리며 울려댔고 아이들의 얼굴엔 오늘도 한 자 배웠다는 뿌듯함이 같이 영글어가는 듯 했다.
소년의 누나에겐 특별한 것이있었다.
빨간 책가방.
국민학교를 입학하는그녀를 위하여 아빠와 엄마는 선물을 주셨는데, 아빠는가죽으로 된 책가방을, 엄마는 아빠의 회색 모직 양복지로 손수 스커트를 만들어주신 것이었다..
일본에서 유래된 이 책가방은 란도셀, 또는 란도세루라고 불리우는 것으로 네덜란드어로 메는 가방을 나타내는 ransel 이란 단어를 빌어온 것으로 알려진, 사각형의 등에 메는 가방이었다.
지금도 일본의 국민학교 학생들은 이것을 메고 학교를 다닌다고 하는데, 가끔 만화영화 같은데에 보면 주인공 소년들이 어김없이 이 란도셀을 메고 나온다.
그녀의 란도셀은 여학생용 빨간색으로 가방 뚜껑에 크게 겹줄 원을 그리고 그 안에 장미꽃 한 송이가 돋을 새김된 매끈한 통가죽으로 되어 있었다.
가죽과 가죽이 이어지는 코너마다 금색 리벳들이 박혀있고 가장자리를 쭈욱 돌아가며 굵은 실로 거칠게 박음질이 되어 있었으며 딱딱한 가죽 뒷면은 마치 풀 먹인 양으로 좀 꺼칠꺼칠한 느낌이어서, 메고 벗을 때, 어깨끈이 얼굴에 스치면 좀 쓰라리기도 했다.
그래서, 학교에 갈 땐 엄마가 책가방을 들고 멜빵끈을 벌리고 서계시면, 누나는 두 멜빵 사이로 들어가 양쪽 팔만 살짝 뻗어 끼워넣으면 되는 거였다.
물론 학교에서 돌아온 경우엔 반대 순서로 하면 되지만, 마음이 급한 경우엔 혼자서 가방을 벗다가 멜빵끈에 뺨을 스치고 투덜대기 일쑤였다.
소년에게 그 빨간 책가방이 돌아온 것은 순전히 무럭무럭 잘 자라준 누나의 덕분이었다.
기차소리 요란해도 옥수수는 잘도 큰다고, 집안이 풍비박산 나던 때에도 누나는 잘도 컸고 결국 더 이상은 도저히 멜빵끈 사이로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체구가 커져버렸다.
게다가 시골에선 알아주던 란도셀은, 서울에 오니 아이들의 구경거리가 되었고, 못된 아이들은 고정쇠 없이 덜렁거리는 가방뚜껑을 뒤에서 쫓아오며 자꾸만 올려쳐대기도 하였다.
옆구리에 펜을 두 개 꽂을 수 있는 초현대식 펜꽂이 장식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누나의 빨간 책가방은 먼지 가득한 다락으로 던져지고 말았다.
다락.
다락은 소년의 작은 아지트였다.
부엌 딸린 단칸방에 있어서의 다락은 너무나 훌륭한 개인공간이었다.
구석구석엔 쌓아놓은 보리박구들 (종이상자들) 사이사이로 먼지도 적당히 쌓여있고, 마당으로 난 뿌연 작은 창으론 언제나 자그마한 햇빛이 들어오고, 부엌 위에 위치했다는 점은 먹을 것 없는 부엌이긴 했어도 항상 마음을 뿌듯하게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일어서기도 힘든 천장이 내리누르고 부엌 아궁이에서 올라오는 열기로 인하여 대부분의 시간 동안은 땀에 젖기도 하였지만, 바닥에 깔린 노란 장판의 매끈한 느낌은 즐길만 했다.
소년은 지난달 사다주신 소년중앙을 보고 또 보고 또 다 읽으면, 그 전달 소년중앙을 찾아 첫 페이지서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지치면 언제나 라디오를 틀어놓고 유행가를 배우는 고모 옆으로 달라붙었다.
팔베개를 하고 나란히 드러누워 한쪽 다리를 꼰 채로, 고모가 그동안 열심히 받아 적은 노래가사를 들여다보며 라디오에 맞춰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백열 전구 하나 달랑 매달린 천장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진도 생각하고 나훈아도 생각하고 김상진도 그려보다가, 목이 아파오기 시작하면 슬그머니 다락으로 올라왔다.
이제 쉬자.
다락 창가는 아늑했다.
뿌연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 사이로 눈을 가늘게 뜨면, 알 수 없는 어떤 문양들이 눈앞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무지개빛으로 반짝이는 그 문양들은 때론 말없이 아래로 떨어지기만 하고, 어떤 땐 즐거운 노래처럼 천장쪽으로 두둥실 떠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창문을 통하여 다른 방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것을 지켜보곤 했다.
나쁜 새끼...
똥톳간이 주인만 쓰는 똥톳간이냐? 나쁜 새끼...
소년에게 막 대하던 주인집 아들내미에게 조용히 감자바위 하나 멕이면서 준비한 욕을 조용히 연습한다.
아줌마,썬데이 서울 새거 사왔어요?
옥색 원피스로 한껏 멋을 부리고 나갔다 돌아오는옆방 아줌마에게 마음속으로 물어본다.
다시 빨간 책가방.
빨간 책가방은 아직도 그 다락의 한구석에 놓여있었다.
이제는 가죽이 광택을 잃고 많이 거칠어졌지만 아직도 그 틀은 튼튼했다.
그리고 그 속에는 그동안 소년이 숱하게 그린, 온 세상의 주인공들이 다 모여있었다.
남진, 나훈아, 김상진, 타이거마스크, 벤 베라 베로, 황금박쥐, 이순신장군, 나폴레옹, 심지어는 소년 자신의 캐릭터까지...
라디오를 통해 들었던, 소년중앙을 통해 보고 읽었던 인물들을 종이로 그려 오려내어 만든, 종이 캐릭터들의 집으로 빨간 책가방은 변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안엔 캐릭터들 뿐만 아니라, 자동차, 배, 비행기 그림들...
그리고 어디서 주어왔는지 모르는 바둑알 세 개.
그들은 인형들의 부하이기도 하고, 병정들이기도 하고, 친구들이기도 한 이를테면 단역들...
소년이 그린, 암호로 가득한 '다락'섬 보물지도.
항상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몽당연필 두어개와 지우개 그리고 가위.
그리고 소년의 투명망또 '보자기'...
종이가 필요하면 또 조용히 내려가 고모의 노래공책을 표시 안나게 뜯어오는 일이 조금 신경쓰이지만, 그것 빼고는 언제고 소년의 상상의 나래를 펴는데 지장이 없도록 모든 것은 갖춰져 있었다.
먼지가 닿지 않을 정도의 면적에 소년은 빨간 책가방으로부터 조심스럽게 모든 인형들을 꺼내어놓고 정렬을 시킨다.
때론 인형들의 팔과 다리가 서로 엉켜 부상당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꺼낼 때가 가장 힘들다.
그 다음으로오늘의 이야기에 맞는 주인공들을 선발하고, 단역들을 정하고, 탈 것들을 징발하고, 보물섬지도를 펼친 다음 모든 것을 알맞은 위치에 분산 배치를 한다.
그리고 상상의 나라로 갈때 항상 쓰는 투명망또 '보자기'를 목에 두르면...
그러면, 이제 다락방에는 오늘의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름하여, 빨간 책가방나라 이야기...
소년이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소년은 자신이 사랑하던 빨간 책가방을 메고 가고 싶었다.
온세상을 그 빨간 책가방에 넣고 둘러메고 어디든 가고 싶었다.
하지만 누나처럼 그 역시도 그 책가방에 비해 너무 크게 자랐음을 깨닫는데는 별로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거친 가죽멜빵에 쓸린 볼은 눈물을 글썽거릴 정도로 쓰라렸다.
게다가 누나의 말처럼 빨간색 가방은 아이들이 여자꺼라고 놀릴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세상 밖으로 나오려던 빨간 책가방은 다시 다락 한 구석으로...
그 후, 어린 소년에게 학교생활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왔는지...
새로운 세상, 새로운정보, 새로운 사람, 새로운 일...
새로운 것들에 적응하느라 그는 차츰 다락방을 뜸하게 오르내렸다.
빨간 책가방과의 시간이 줄어들었다.
상상의 공간이 현실로 점점 차오르기 시작했다.
얼마가 지나고 그의 가족이 그 동네를 떠나게 되었을 때 그는 보았다.
고물상으로 실려갈 잡동사니들 사이에서 빼꼼히 머리를 내밀고 있던, 빨간색이라고는 거의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다 낡아빠진빨간 책가방을...
출발하는 삼륜차에 타고 있던 소년은 당장 차를 스톱시키고 뛰어가 그 소중했던 빨간 책가방을 주어들고 싶었지만, 그의 몸은 그렇게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것마저도 묻어버리고 싶었던 과거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었을까?
소년은 뿌옇게 젖어오는 시선의 끝으로 멀어지는 빨간 책가방을 마냥 바라만 보았다.
몇 수 백개의 이야기가 만들어졌는지 소년은 지금 기억하지 못한다.
몇 수 십개의 캐릭터들이 빨간 책가방 속에 존재하였는지 소년은 지금 기억하지 못한다.
그 속에 자리했던 상상의 나라 건설기지...
빨간 책가방 속에 존재했던 꿈은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그 책가방을 찾으면 그 꿈들도 돌아오는 것일까...

(201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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