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전자전(父傳子傳)
유전자(遺傳子): 유전형질을 나타내는 원인이 되는 인자. (=유전인자: 遺傳因子)
어버이의 염색체 속에 일정 순서로 배열되어 있으며, 생식세포를 통하여
자손에게 어버이의 유전형질이 전해짐.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 꺼내드는 이야기 보따리가 있다.
나 군에 있을 때 말야... ^^
술집에서고, 강의실에서고, 직장에서고든 어디서든지 이 보따리가 한 번 풀렸다 하면 도끼자루 썩는 줄도 모를 뿐더러, 상대방 담배갑의 마지막 한 개피도 마다않고 뽑아가는, 블랙홀을 경험하게 된다.
인생의 종착역에 도달할 즈음까지도 구구절절 스토리가 잊혀지지 않고 반복되어지는 것을 보면, 과연 군대는 한 번 쯤 갔다오는 것도 괜찮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첫사랑은 잊어도 첫 고참은 못잊는다는 말도 있지? 아마... ^^
물론 나도 군에 있었을 때가 있었다.
대한민국 최정예 전투병과...... ^^
와는 거리가 아주 아주 먼, 공군장교로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그 빛나는 밥풀떼기 두개를 어깨에 얹기 위해 담굼질을 하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K라는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는 소위 말하는 명문대 출신으로서 뭐든지 시키면 시키는대로 곧이 곧대로 모든 것을 다 할 것 같은 인상의소유자.
하지만 그의 내무반에 들어서면 방의 느낌도 다르고, 냄새도 다르고... 뭔지 형용할 수 없는 다른 점들이 느껴졌다.
취침점호를 받기 위해 모두가 청소에, 관물함 정돈에 바쁠 때에도 그의 내무반원들은 침대에 누워있기도 하고,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곤 했고, 또 그렇게 하고도 점호시에 별 지적을 안받는다든지... 참 이해하기 힘든 구석들이 있었다.
어느 날이었던가.
그 때 나는 완전무장 구보를 마친 직후라서온 몸이 땀에 젖은 채로 연병장에 큰 대(大)자로 퍼져누워 쉬고 있었다.
힘들어?
누군가가 나의 어깨를 주무르듯이 만지면서 내 옆으로 와 앉았다.
누구야? 어, K로구나... 힘들긴 뭘...
풀어헤쳐 놓았던 수통을 집어들며 상체를 반쯤 일으켜 세웠다.
그래도 이렇게 한 번 뛰면 후련해지고 가뿐해짐을 느껴.
아까 P의 총까지 들고 뛰는거 보고 놀랐어. 체력이 좋은가봐?
아무 말 없이 씩 웃자, 그는 주먹을 불쑥 내밀어 바스락거리는 뭔가를 내손에 쥐어줬다.
비밀이야.
뭔데?
그것은 박하사탕이었다.
투명한 비닐에 싸인 민트향의 하얀 설탕덩어리.
금기(禁忌).
먹어도 먹어도 살이 빠질 만큼 곤한 훈련 중에 먹는 그 사탕의 단맛이란...!
군인치고 쵸코파이 안좋아하는 사람이 없는 것도 똑같은 이유일 것이다.
고맙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그는 내무반을 향하여 총총 멀어져갔다.
또 어떤 날이었던가.
저녁식사 시간 후 잠시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전투화 손질을 하기 위하여 뜰로 내려왔다.
어제 심한 빗속에서 전술훈련을 해서, 군화는 누런 황토로 떡이 되어 있었다.
벌써 나보다도 부지런한 서너명이 먼저 나와 전투화를 깨끗이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K도 그 중 하나였다.
내가 전투화에 말라붙은 황토들을 다 깨어내고 솔질을 시작했을 때 그는 나에게 윙크를 한 번 하고 주섬주섬 전투화를 챙겨 들었다.
먼저 갈께. 점호 전에 우리 내무반으로 와.
하지만 그의 전투화는 구두약을 먹이지도 않은 채로 솔질만 끝낸 모습이었다.
취침점호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 우리 내무반의 L이 반짝반짝 빛나는 전투화 한 켤레를 들고는 싱글벙글 웃으며 들어왔다.
방금 전만 해도 전투화 손질을 잊어서 기합받을 것만 예상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거야?
K가 물구두약 한 번 발라줬어. 히힛.
물구두약?!!!
아까 점호 전에 자기 내무반에 오라고 한 이유가 그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은 마침 저녁 학과가 늦게 끝나서 후보생들이 전투화손질을 할 시간이 없었고, 그에 따라 당연히 취침점호는 기합 받는 소리와 함께 밤 깊는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그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들이 그의 머리에, 또 그의 손에 있었다.
분명 입교(入校)할 때, 모든 사제(私製) 물품은 압수가 되었는데... (심지어는 성경책까지도)
그는 어떻게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지, 아니면 어디에서 그런 것들을 가져오는지, 또 어떻게 구대장들의 눈에 띄지 않게 보관할 수 있는지...
평범한 나의 상식수준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내무반의 땀 냄새를 없애기 위한 은은한 방향제, 항상 뽀송뽀송 하기 위해 물 먹는 하마, 더울 때 얼굴을 식힐 수 있는초소형 선풍기, 틈틈히 먹어주는 간식꺼리 등등...
그의 편의생활에는 빈틈이 없었다.
취침 중 불시에 걸리는 야간 비상훈련이 있다.
5분만에 완전군장으로 집합하는 그 긴박한 순간, 연병장으로 달려나가면서 언뜻 그의 내무반을 본 순간 나는 거의 기절할 뻔 했다.
K는 그 짧은 시간을 쪼개내어 바르는 모기약을 얼굴과 손에 바르고, 칙칙이 분무에프킬러를 온 전투복 위로 뿌려대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우리의 눈이 마주쳤고, 그는 모기약통들을쌍권총처럼 흔들어 보이며 자신의 내무반으로 들어오라고 고개짓을 했다.
나는 시간이 얼마 없으니 빨리 나오라는 손짓을 하고 집합장소쪽으로 내달렸다.
그 밤, K를 제외한 수 백명의 공군사관후보생들은뜨거운 젊은 피를 진주 근처에 사는 모기들의 평생 잊지 못할 포식을 위하여 헌납해야만 했다.
특기교육이 시작되면 모든 사람은 자신의 고유한 특기병과를 지정받게 된다.
행정, 교육, 보급, 무장, 통신, 헌병, 정훈, 기상 등등...
그는 역시 그의 특성대로 보급특기를 받았고 나는 정훈을 받았다.
시간이 갈수록 그의 편의품목 보급은 더욱 다양해지고 원활해졌고, 내가 그에게 신세지는 횟수도 당연히 늘어만 갔다.
임관 후에도 필요한게 있으면 나한테 전화만 하라구. 내 바로 특급으로 쏴줄테니...
드디어 길고 길었던 5개월의 훈련이 끝나고 임관식이 있던 날.
서울에서 진주라 천리길을 내려오신 부모님께서손수 밥풀떼기 두개 중위 계급장을 양쪽 어깨에 달아주시던 날이었다.
갑작스레 무더워진 날씨는 32도를 오르내리고, 아침부터 정복차림으로 임관식 연습을 한 덕택에 진짜 임관식이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온 몸이 땀에 젖어있었고 소매끝으로 한 방울 두 방울 땀들이 맺혀졌다 떨어지곤 했다.
누군가 뒤에서 내 목덜미에 수건을 얹어주었다.
K.
그 자신도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면서 어디서 났는지 내게 여분의 손수건을 건넨 것이었다.
엇따, 나보다 땀을 더 흘리넹?
드디어 계급장을 달아주는 시간이 되자, 사방에서 대기하시던 부모님들께서 우르르 나오시고 양산으로 햇빛을 가려주랴, 땀 닦아주랴, 물 좀 멕이랴, 계급장 달아주랴 정신이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그 와중에도,
야, 넌 중위다? 대부분은 소윈데...?
내가 잘 나서가 아니라 정훈특기는 원래 중위로 임관한다고 말씀드려도 흐뭇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셨다.
당신께서 군대를 가고자 하셨어도 못가셨던 마음에 보상이라도 된 것인양...
어, 이게 누구야?
누군가가 반갑게 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신 아버지께선 깜짝 놀라셨다.
K의 아버지가 고등학교 동창이셨던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가난한 고학생으로 타지에서 자취생활을 하던 우리 아버지를 위하여 K의 아버지는 항상 도시락을 두 개 싸와 하나씩 나눠드셨다고 한다.
두 분께서는 훈련기간 중 K가 항상 나에게 여러가지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박장대소 하셨다.
아버지도 얻어 먹고, 아들도 얻어 먹고... 대대로 얻어먹는구나...하하하.
이것도 부전자전이라구 하겠구먼... 하하하.
야, 근데 넌 뭘 잘못해서 소위밖에 못되었냐? 쟨 중위구만... ^^
아유, 아버지 저 잘못한 거 없어요. --;;
얻어먹기는 재네 아버지가 얻어먹어도 우등은 항상 쟤네 아버지가 하더니, 이건... ㅉㅉ 아들대에 와서도 계급이 밑이여? 어떻게....
대대로 미안합니다. ^^
아낌없이 주던 나무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도... 또 그의 아들도...
보은의 달 오월, 그 따뜻하고 풍족했던 마음들을 기억하고 싶다.
대대로 감사합니다. ^^

(2010.05.19)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