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뽑기집을 접수하다

"아저씨, 팬저탱크 프라모델 나왔어요?"
"없다."
시장사람들의 왁자한 소리 속에 귀찮은 듯 문방구 주인이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소년은 문방구 주인이 한 달 후에 나온다고 이야기 했던 것을 상기하고 다시 한 번 유리진열장 너머로 더 가까이 몸을 구부리며물었다.
"팬저탱크 나왔냐구요..."
"아, 거, 없다니깐!"
화를 버럭내며 소년을 향해한쪽 입술을 질끈 물은 얼굴이 벌겋게 돌아왔다.
소년은 그만 겁이 덜컥나서 방금전 구매하려고 손에 들고있던'독일병정세트 2호' 를 황급히 제자리에 갖다놓고 주인의 눈길을 피하여 황황히 문방구 밖으로 걸어나갔다.
'자기가 한 달 후에 나온다구 해놓고 왜 나한테 신경질이래?'
'내가 그거 사려고 중계소에서 여기까지 걸어왔는데.....씨이.'
겁도 먹은 터에 당황한 소년의 다리는 후들후들 떨렸다.
'이제 다신 오나 봐라...나쁜 XX, 왜 나한테 화를 내구 그래?'
이제 막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거리에 비칠대며 걷는 자신의 모습에 더욱 화가 치밀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잽싼 걸음으로 걷던 그의 손에 약간의 지폐와 동전들이 감지됐다.
팬저탱크를 위해 저금통도 뜯었건만...에이, 잘 먹고 잘 살아라.
멀어진 문방구를 향해, 아무도 안볼 때 감자바위라도 하나 먹여줄까 하고 두리번거리는그의 시야에 둥그런 천막이 하나 들어왔다.
하, 돈도 있는데 따뜻한아톰바 라도 하나?
뜨끈한 어묵 먹는 상상을 하니 갑자기 긴장되었던 온 몸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천막 안에서는아톰바는 팔지 않고, 한 아줌마가 앉아서 뽑기를 팔고 있었다.
"어? 밖에 아톰바 라고 써있던데... 안팔아요?"
"응, 다 떨어져서 그러거든.뽑기나 달고나나 둘 중에 하나 해라."
그는 사실 둘 다 원하지 않았으나, 사지 않고 그냥 나가는 손님들에게 상인들이 눈을 흘기거나 욕을 해대는 것을기억하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달고나를 달라고 했다.
나무막대 끝에 달고나를 찍어먹으면서 소년은 이 천막 안에 있는 유리 진열장 안에 자기가 좋아하는 플라모델처럼 뽑아놓은 비행기, 자동차, 총 등 꽤 많이 전시되어 있는 것에 놀랐다.
"아줌마, 이거 다 파는거예요?"
"그럼~, 돈내고 사도 되고 제비뽑기 해서 상으로 받을 수도 있고..."
아줌마의 입가에 부드러운 웃음이 돌더니, 제비쪽지가 가득한 분유깡통을 그 앞으로 슬몃 밀어내었다.
"함 해볼래?~"
소년은 그냥 호기심에 한 번, 두 번 제비를 뽑기 시작했고,천막 안엔 소년과 아줌마의 후끈 달아오른 열기로 달고나 녹이는 연탄화덕이 덥게 느껴질 정도였다.
깡통에는 분명 상보다 꽝이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차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소년의 앞에는 이런 저런 뽑기모형들이 쌓이기 시작했고 아줌마의 진열장은 점차 비어가기 시작했다.
"엿차!, 이 만원!"
"어디 봐, 어디?"
소년은 자랑스레 뽑은 제비를 내보였고 아줌마는 눈을 흘기며 앙칼지게 그것을 뺏아갔다.
"이 만원 대신 저 비행기 가져!"
아줌마가 소년의 허벅지 만한, 제일 큰 뽑기모형을 가르키며 씨근덕거렸다.
"비행기는 만 원이라고 써있는데요?"
"저 칼도 가지면 되잖아, 이 웬수야!"
벌겋게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아줌마는 들어오는 꼬마손님들을 다 물리치고 소년과의 한 판에 열중했다.
두어시간이 지났을 때, 그들은 이미 세번째 제비깡통을 비워냈고, 소년은 다 딴 뽑기모형들을 아줌마에게 현금 만 원에 두 번씩이나 팔고도 다시 거의 모든 뽑기모형들을 그의 무릎 앞에 끌어더 놓고 있었다.
"너, 딴 사람은 먼저 못일어서는거 알지? 너, 집엔 다 갔어." (씩-씩-)
기실 소년은 그렇게 따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그냥 학교 앞에서 가끔 아저씨들이 서서 하던 제비뽑기가 궁금해서 한 번쯤 해봤을 뿐이었다.
게다가 동네에서 딱지나 구슬치기를할 때도딴 경우에는 잃은 사람이 포기하기 전에는 그만 두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뽑기모델을 자꾸 따기 시작하자 조금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더 잃으려고 마구 뽑아댔는데...... 웬 걸.
도대체 '꽝' 이 있기는 한 건가? 하고 소년이 의아해 할 정도였다.
점심 무렵 천막을 들어선 소년은 해질 무렵 저린 다리를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천막 이젠 내 꺼예요, 아줌마."
"그래! 이눔아! 이 나쁜 눔아, 난 어떻게 살라구???"
하두 머리를 긁어대서 산발이 다 된 아줌마는 뻘건 얼굴로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길래, 내가 아까 간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아줌마가 자꾸 못가게 했잖아요!"
"못살아, 못살아...엉엉엉."
갑자기 아줌마가 징징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소년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그 앞에 서있었다.
이 뽑기집 이젠 내 껀데......
옆 천막의 험상궂은 풀빵아저씨가 와서 교통정리를 시작했다.
천막과 뽑기모델들은 다시 아줌마에게로 돌아갔다.
"이 쪼그만 녀석이... 현금 얼마 땄어?"
이미 그에게 뒤통수 한 대 얻어 맞은 소년은 눈물이 그렁그렁한채로 주머니에 있는 돈을 주섬주섬 꺼내놓았다.
"그 중 삼천 이백원은 원래 제 돈이에요."
"그럼....보자, 딴 게 총 삼만 육천 오백원! 에라, 이눔아."
풀빵아저씨의 큰 손이 하늘로 오르자 소년은 얼른 상단막기 자세를 취하며 항변했다.
"내가 그만하자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아줌마가 못가게 했단 말이예요."
풀빵아저씨는 기가 막힌듯 혀를 한 번 차더니, 만 오천원을 세어서 소년에게 주고 나머지는 뽑기아줌마에게 찔러주었다.
"빨리 가, 이눔아. 공부나 열심히 해라, 이눔아."
해가 뉘엇뉘엇 넘어가는 고개 꼭대기를 오르자 멀리 집 옆 영등포고등학교의 담장이 보였다.
소년은 그만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터벅터벅 내려가기 시작했다.
바지주머니에 든 지폐뭉치가 허벅지를 통하여 두둑하게 전해져 왔다.
정당한 승부였는데, 왜들 그러는거야?
그 뽑기집은 내가 땄다구......
소년은 스스로에게 빙그레 웃어주었다.
그래, 승자는 관용이 있어야 하는거 라고 타이거마스크에 나오지.
아줌마, 아줌마는 진거구 난 이겼는데 용서하고 돌려주는거라구.
어느 집에선가 저녁식사를 준비하는지 된장국 냄새가 흘러나왔다.
식구들이 좋아하는 인디안밥이나 몇 봉지 사들고 들어갈까?
뿌듯함이 소년의 가슴에 화악하고 번져왔다.

(2008.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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