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멜레온 카멜레온
요즘은 가끔가다 아이들에게 어릴적 이야기를해주면서, 피식하고 웃을 때가 종종 있다.
TV가 흑백이던 시절.
가가호호 6시만 되면 신나는 만화영화들과 주말의 '웃으면 복이 와요' 코미디 프로그램, 그리고온 동네 사람들이 소리지르며 보던 김일과 안토니오 이노끼의레슬링.
아, 정말 볼 게 많았는데...
그 시절 우리 남매에게 제공된 미디어 매체는 소년중앙과 소년동아일보가 전부였긴 해도 그나마 그것들이 우리의 유일(?)한 위안거리였고 우리를 진화케 하는 도구였다.
학기초가 되면 선생님들은 어김없이 질문을 던지셨다.
"집에... 냉장고 있는 사람?......하나, 둘, 셋....열 다섯, 좋아."
"집에... TV 있는 사람?...... 너무 많다. 다시, 집에 TV가 없는 사람?...하나!"
"너, 장난하는 거 아니지?"
조그맣게, "네".
짖궂은 친구들은 생각나면 한번씩 좋은 웃음거리로 이용하곤 했다.
"야, 너 어제차범근이 골잉 넣는 거봤어?"
"아니"
"아, 참 너네 TV없지. 무지 재미있었는데..."
뭐,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를 주눅들게 만들었다든가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이제 가정환경조사서에서 흑백TV 항목이 사라지고 나서야 우리집에도 흑백TV가 들어와서 9시 MBC뉴스에서 변웅전 아나운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후 자의반 타의반으로 물건값 대신 받은 컬러TV가 들어와서 그나마 두어번은 환경조사 때 '컬러TV 있는 사람'에 손 들었다.
우리집에 때르릉 하는 전화벨 소리가 처음 울려퍼진것은 내가 대학 2년생일 때였다.
"아, 여보세요. 아빠다."
"네, 웬일이세요? (집으로 전화를 다 하시네)"
"그냥 잘 들리는지 걸어봤다."
그땐 몰랐지만, 당신께서도 그 전화라는 미물에 기쁘셨던게다.
아버지, 저는 당신의 아들입니다.
나 역시도 변화에 무척이나 느리게 반응해 왔다.
예를 들자면, 남들이 인터넷을 ADSL로 업그레이드 하기 시작할 때, 그제서야 일반 모뎀으로 인터넷을 시작하고, 핸드폰 카메라는 아직 구경도 못해봤다.
MP3는?
'들어는봤다' 의 상태이다.
물론 '느림의 미학' 도 있다.이 숨가쁘게 전개되는 현대 문명의, 첨단 과학의 발달에 편승하여 모든 것이 1과 0로만 전개되는 이진법의 비트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정신없이 살아가는 삶 보다는,그저 한걸음만이라도 뒤로 물러서서 사물과 현상을 관조하고 사색하며 유유자적 즐기는 도인의 풍모로 살아가는데 묘를 느끼는 것이다.
어차피 모든 것을 다 쫓아가며 다 따라갈 수는 없지 않은가?
꼴찌의 위치에서는모든 참여선수들과 달리기 경주의 흐름을 더 잘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레코드가 처음 CD로 넘어갈 때 많은 사람들이 망설였다.
정말 가도 되는가?
그래도 이게 훨씬 인간적이잖아?
컬러필름이 대종을 이루기 시작할 때도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컬러는 영 무게가 없어서...
그걸로 예술사진 찍을 수 있나?
디지털 카메라와 필름 카메라는 어떠한가?
필름 카메라를 누르는 디지털 카메라의 장점은 너무나 많다.
사진 퀄리티.
편집의 편리성.
보관의 편리성.
경제성.
다른 매체와의 호환성 등등...
시간과 돈의 가치로 따진다면 엄청난 효용을 디지털 카메라는 가져다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플러스적인 변화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바로, 디지털 카메라의 이러한 압도적인 장점들에 싸여 그보다 더 큰 것을 우리는 잃고 있지는 않나 하는 우려에서 비롯된다고 생각된다.
한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 고민하고 연구하고 사색하고 방황하던 무명의 마에스트로들.
원하던 그 한 커트를 찍기 위해 투자되던 시간과 돈.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하면서도 똑같은 무게의 투자를 할까?
사진기 앞의 시간이 많은가, 아니면 포토샵과의 시간이 많은가?
나 자신, Olympus C-750 과 Casio Exilim Z-750 이 주는 혜택을 흠뻑 누리면서도, 자꾸만 필름 카메라의 뒷모습을 흘끗거리며 아쉬워하는 모습으로 있다.
변화를 두려워 하는가?
아니면 시대에 뒤처지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카멜레온, 카멜레온아.

(2007.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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