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리 눈물고개

미아리 눈물고개
님이 넘던 이별고개...
우리는 그 때, 1971년 봄 세 바퀴 달린 삼륜차에 그동안 서울생활에 제법 늘어난 짐을 싣고도 남은 적재함에 가로누워 미아리고개를 넘어왔다.
서울 구경시킨다고 3.1 고가도로를 탄 덕분에 싱그러운 바람을 맞으며 달려왔지만은 서울역 앞을 지나면서 흐르기 시작한 눈물로 두 뺨은 차갑게 얼어붙은 듯 했다.
'내 생애 두 번 다시 미아리에는 오지 않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국민학교 3학년이 무엇을 그리 알겠냐만은 가난은 그만큼 아픔이었다.
4년 전, 어느 순간 정치적 약자로 몰려버린 젊은 농촌운동가의 실패.
늦은 밤 곤히 잠 든 아이들을 가만 가만 깨워 옷을 입히시고 짐을 꾸리신 어머니.
기관차가 내뱉은 증기가 뿌옇게 앞을 가리던 서울역의 새벽 플랫홈.
가져온 짐이라곤 3단 책상설합 만한 판자 박스 하나.
손에 쥔 돈, 단돈 700원.
그리고 젖먹이를 포함한 아이 셋.
700원?
그 당시에 쌀집에선 쌀 한되를 종이봉투에 넣어 '봉지쌀' 이라고 해서 팔았는데, 그게 80원이었으니 쌀 한말 값도 안되는 금액이었다.
그나마 미아리 변두리의 산꼭대기 삯월세 내고 뭐가 남았을까?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것이 우리 가족의 서울살이 첫 걸음이었다.
모든 사람이 가난했던 시절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감사하기 위해 몇 가지 에피소드를 기록하고자 한다.
아버지는 한동안 아무 일에 손을 대지 못하고 지내셨다.
하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서울 시내로 출퇴근(?) 하시면서 건재함을 과시하려 하셨다.
이상이 크기도 하셨지만 자존심도 강하셨던 분이,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온 실패를 이겨내기 위해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으리라.
어머니는 반찬값이라도 마련하고자 여러가지 일들을 시도하셨다.
꽃만들기, 구슬꿰기, 가죽축구공 꿰매기, 사관학교 견장 꿰매기 등등...
결혼 전까진 한 번도 험한(?) 일을 해보지 않으셨던 어머니의 손은 금새 찢어지고 터지면서 굳은 살이 박히기 시작했고, 한 번은 가죽축구공을 꿰매던 바늘 머리가 골무와 손가락을 뚫고 나와 무명헝겊으로 손가락을 둘둘 말아 다니신 적이 있으셨다.
근본적으로 쌀 살 돈이 없었던 우리 가족의 주식은 배급 밀가루였다.
수제비, 칼국수, 수제비, 또 수제비, 그리고 수제비와 약간의 밥, 어쩌다 칼국수, 그리고 수제비, 또 수제비와 약간의 밥... 뭐 이런 식이었다.
죽어라 수제비를 먹었고 또 수제비 덕분에 살았지만, 그 수제비에 한 두개씩 들어가던 멸치는 정말 싫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무도 안 먹는 그 멸치를 아주 맛있게 잡수시곤 했다. (영양보충을 위하여)
내 바로 아래 동생은 그 와중에 곱추병에 걸렸고, 지금의 국립의료원 전신인 스웨디시 메디컬센터에 입원하여 장기간 치료받는 혜택(?)을 누렸다.
어쩌다 면회를 가면, 유리창 너머의 우리 아기는 사정없이 울어댔고, 어머니는 뒤돌아서 눈물을 훔쳐대셨는데, 양코백이 간호사는 그렇게 울어대는 우리 아기가 예쁜지 연신 싱글벙글 했다.
메디컬 센터는 우리 아기의 '미래'를 위하여 스웨덴으로의 입양을 제의하기도 했지만, 결국 아버지와 어머니는 거절하고 만다.
우리가 살던 산동네와 아랫 동네는 눈이 오면 항상 동네 대항 눈싸움을 하루종일 벌이곤 했다.
하지만 산동네 아이들은 근본적으로 저학년 위주이고 아랫 동네 아이들은 고학년이었기 때문에, 눈싸움 시작 후 한 두 시간이 지나면 산동네에 비축된 연탄재와 눈덩어리도 바닥을 보이고 결국은 아랫 동네의 돌격으로 마감하게 마련이었다.
한 번은 어린 나이에 조금 더 밑으로 공격 나갔다가 아랫 동네의 돌격시점을 맞아 도망치게 되었는데, 나름대로 머리를 쓴다고 길 옆 배추밭을 가로지르다가 그만 한쪽 발이 거름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
아랫 동네 아이들에게서 보다 더 많은 매를 어머니로부터 선사받았다.
하나 밖에 없는 신발을 더럽혔으니... (그 냄새하곤...^^)
당시 가장 맛이 있었던 것은 삼립 크림빵(10원) 과 단팥빵(20원) 이었다.
어느 겨울날, 손님이 오셔서 누나와 나에게 크림빵 사먹으라고 10원씩 주셨다.
누나와 나는 신이 나서 아랫 동네 가게로 가다가, 한 생선장수(?)를 만났다.
그는 손바닥 만한 크기의 말린 물고기 열마리를 10원에 팔고 있었고, 우리 어린 생각에 20원이면 20 마리고, 그만큼이면 우리 가족이 저녁에 포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
하지만 연탄불에 올려진 물고기들은 국멸치만한 크기로 쪼그라 들었다. --;
억울한 마음에 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어머니는 사먹으라는거 안사먹고 쓸데없는 짓 했다고 혼내시고......
없이 사는 가운데에서도 아버지는 '소년동아일보' 와 월간 '소년중앙'을 우리를 위해 구독하게 해주셨다.
'소년동아일보'의 기사와 만화도 재미있었지만, 매일 나오는 과목별 학습문제 풀이가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고, 이 신문 구독은 그 후에도 한 10 여년 지속되었다.
'소년 중앙' 은 메마른 삶에 던져진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너무나 많고 재미있는 상식 읽을거리, 도전자 하리케인, 타이거마스크, 태양을 쳐라, 무지개합창 등의 수준 높은 별책부록 만화는 온 가족의 벗이 되고도 남았다.
동화책이나 만화책이나 항상 착하고 가난한 주인공 옆에는 나쁜 주인집 아이들이 있었다.
마당 안에 하나 밖에 없는 화장실을 가려고 하면 가로막고 인사하고 지나가라고 요구하던 놈.
50권짜리 '세계소년소녀명작동화' 를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은 분명 한 번도 보지도 않는데 빌려볼라하면 심통부리며 안된다고 부들부들 떠는 놈.
뒤로 살그머니 다가와서 아무도 못듣게 나지막한 소리로 '거지' 하던 놈.
얻어 입은 옷, 얻어 신은 신발을 자기 꺼니까 돌려달라고 쫓아다니면서 막무가내로 떼쓰는 놈.
또는 그러한 사실을 동네 아이들에게 마구 까놓고 이야기 하는 놈.
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손 보고 싶은 놈들이 너무 많았다. ^^
가장 신나는 날 중의 하나는 어쩌다 어머니가 삼양라면 공장견학을 다녀오시는 것이었다.
그 때 삼양라면은 초창기였던지라 판촉행사로 공장견학을 많이 실시했고, 견학 후엔 라면이 약 20개 정도 한 봉지에 들어있는 '덕용' 2봉지를 모두에게 안겨주었던 덕분에, 한 일주일은 신나게 그러나 아끼면서 라면을 포식하고 국물까지 쪽쪽 빨아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삼강하드 공장견학은 별 재미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내 입장에서는)
신작로가 나면서 그 산동네는 다이너마이트의 굉음과 함께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아버지는 4 년여만에 다시 일어나시게 되고 우리 가족은 집을 마련하여 미아리고개를 넘어 이사를 오게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밝은 웃음.
이제 다시는 그런 날이 없을거라는......
예전엔 남 부럽지 않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하루하루의 끼니를 걱정하던 그 때.
돈이 뭔지도 잘은 몰랐지만, 무언가 배가 터지도록 먹고 싶던 그 때.
책이 보고 싶을 때 꺼내볼 수 있는 내 책이 있고 싶었던 그 때.
그리고 내게 있던 모든 장난감을 뒤로 하고 떠나온 그 집을 막연히 돌아가고 싶어하던 그 때.
우리 가족만의 변소가 있었으면 하던 그 때.
그 모든 것을 미아리고개에 떨구고 왔다.
하지만 잊지는 않는다. 그리고 감사한다.
......
거의 40 여년 된 이야기.
그 노래가 들려오면......
미아리 눈물고개
님이 넘던 이별고개...
(2008.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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