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오십부터래...

인생은 오십부터래... ^^

2011년 7월 12일 화요일

무림에 살다

무림(武林)에 살다










나는 태권도 국제공인(國際公認) 3단이다.
...이다.
...일까?

근데 나는 태권도도장이라는 곳을 국민학교 3학년 때 2주일간의 '체험기간' 에 잠시 도장을 다닌 후 노란띠를 허리에 맨 것이 태권도를 접한 모두였다.
물론 군대 훈련기간에 무조건 다같이 한 것은 치지 않도록 하자.
이야기를 들어보면 알겠지만, 태권도 국제공인 3단이라는 것과도 아무 상관이 없으니까...
그러면, 어떻게 국기원에도 가지 않고...? ^^

때는 바야흐로 은자의 나라 코리아에 물 건너 열풍이 막 일기 시작하던 1980년대 중반.
삼천리 반도천하의 호랑방탕한 뭇청년들은 제각기 괴나리 봇짐에 짚세기 두어 짝씩 둘러메고, 저 망망대해 푸른 바다 건너 동으로 동으로 떠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 물 건너에, 뭐 특별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것이 시대의 흐름이었고 요구였었다.
하여, 국사봉 꼭대기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던 무길도한량도 '진정 도(道)란 무엇인가' 하는 영원한 화두를 깨치기 위해 일엽편주에 몸을 싣게 되었겠지?

그가 도착한 곳은 제법 커다란 서당이 있는 곳으로, 이미 우리 동포들도 제법 와있었는데...
우리나라 동포들 아이들 가르칠 때, "너, 어디 가도 기(氣) 죽지마." 하고 가르치는 부모들이 많다고 하더만, 그곳에 나가서도 서로 기 안죽으려 발버둥치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젊은 남자들 사이에서는 은근히 주먹이 세다는 것을 과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방끈 긴 사람들이, 하는 짓은 꼭 초등학생들 같아서... ^^
"내가 옛날에 태권도 좀 했지...헐헐헐."
"옛날 성미 같으면 손 좀 봐줬을텐데...ㅋㅋㅋ"

공부 잘 하는지 못하는지는 출신학교 보면 대강 짐작은 하는 것이고, 그외의 것은 서로 눈치껏 짐작해야 하는 처지이다 보니 그랬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지고 못사는 한국남아의 용맹무쌍 감투정신의 발로였던 것일까?
또 아니면, 초기 이주자들의 태권도 무용담에 도취되어버린 것일까?
태권도 유단자들처럼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었다.

무길도한량은 어디 가서 맞고 다니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싸워본 적이 없으니까^^)
묵직한 덩치에 약간 굽은 어깨 (후까시 들어갔다고도 표현), 날카롭게 째진 두 눈과 어눌하게 돌아가는 세 치 혀의 놀림은 영락없는 깍두기 포스를 느끼게 만들기 충분했다.
"무길도한량도 운동 좀 했지?"
"아, 예. 숨쉬기 운동, 새마을 운동 같은 거요?"
"허, 이 사람 겸손한 체 하기는...헐헐헐."
이렇게 이야기 했는데, 소문은 '무길도한량이 한 때는 운동 좀 했대' 라고 퍼졌다.

군대 가서 태권도 초단을 딴 K 라는 사람이 있었다.
주먹에 웬 겉멋이 들었는지 가끔 우리 동포들을 때리는 습관이 있었다.
"K형. 거 주먹을 좀 아끼시지요."
단골로 얻어맞던 한 친구를 보다못해 무길도한량이 K에게 한 마디했다.
"어-, 그래. 운동 좀 했다며? 한 번 붙어볼까?"
이런...ㅉㅉ, 어린애도 아니고...

하여간 오지랖 넓게 끼어들었으니, 일단 여기서 밀리면 진짜 맞게 생겼다.
"싸우기 위한 거라면 태권도를 욕되게 하는 거지요. 내 차라리 K형한테 맞아주리다."
눈 한 번 깜빡거리지 않고 상대방을 째려보며 이렇게 이야기하자, 그는 금새 혼란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맞아주겠다?'
나는 그를 3초간 더 째려보다가 천천히 돌아서서 그의 방을 나왔다.
'무길도한량이 멧집 좋은 태권도 선수래' 하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배경이었다.

한 번은 이웃한 시골마을의 작은 맥주집에 갔을 때였다.
학생회관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여학생이 남자친구와 놀러 와있었는데, 남자친구가 술이 약했던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곤드레만드레 테이블에 엎어지고 말았다.
이 때 역시 술에 잔뜩 취해 지나가던 남산만한 두 녀석이 이 여학생에게 아는 체하며 농을 걸기 시작했다.
점점 여학생의 얼굴에 싫어하는 표정이 역력하게 나타났지만, 두 녀석은 여학생을 양쪽에 앉아 계속 그녀를 귀찮게 굴었다.
나와도 면식이 있던 터라 급기야 그 여학생은 나에게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쭈빗쭈빗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가 안부를 물었다.
"꺼져, 이 XXX야."
한 녀석이 내게 소리를 질렀고, 한 녀석은 제대로 주체하지도 못하는 몸을 일으켜 나를 붙들려 했다.
덩치들이 하도 커서 겁도 났지만, 일단 이 두 녀석을 그 여학생으로부터 떼어내기로 마음먹고, 집게손가락을 까딱거려 그들을 불렀다.
"나와."
돌아서서 출입구쪽으로 천천히 걸어가자 두 녀석이 비틀거리며 따라나왔다.

이야기는 참 우습게 돌아가는 것이, 이 광경을 본 사람들 중 우리 동포들이 또 있었다.
문 밖으로 나가서 내가 한 것이라고는 초등학교 때 2주간 배운 태권도 대련자세를 잡고, 위협용으로 앞차기를 허공에다 대고 한 번 질렀다는 것 뿐.
근데 우연찮게도 다가들던 한 놈의 배에 정콕으로 맞았다는 거와 그가 넘어지면서 다른 한 놈을 붙잡고 같이 쓰러졌다는 거.
"저 XX, 가라테 하는 모양이다."
하며 한 놈이 비틀비틀 다른 한 놈을 일으키며 꽁무니를 빼다가 도망가다 또 자빠지고...

하여간, 이 일로 '무길도한량이 헤비급 두 명을 떡을 만들어놨다' 고 또 과대포장되어 소문은 나고, 소문은 소문 스스로 침소봉대되는 성격이 있어서,
'무길도한량이 번개처럼 날아서 한 놈을 앞차기로, 내려오면서 또 한 놈을 돌려차기로 아작을 냈는데, 두 놈 다 완전히 쭉 뻗어서 기절했다네...' 라고 까지 야그가 되었다.

그 다음부턴 사람들이 무길도한량을 태권도의 고수쯤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더더군다나 남자들은 무술에 대해 관심들이 많지 않은가?
"아이, 국민학교 때 태권도 안해본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에이, 얘기 들어보니까 그 수준이 아니던데, 뭘..."
"무슨 얘기요?"
"아, 거 왜 K도 한 방에 갔다 그러고, 껄렁거리는 T도 무릎 꿇고 빌었다 그러고, 미국놈들 두 놈도 완전 KO 시켰다든데...?"
"에이... 그거 다 헛소문예요."
암만 이렇게 이야기 해도 사람들은 소문을 더 믿었다.

그곳에 태권도강좌가 있었는데 사범이 없어서, 유도강좌에 사범을 하고 있는 사람이 태권도 초단으로 코스를 진행하고 있었다.
학생회관에서 다른 사람들과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나를 찾아왔다.
"태권도 코스 좀 맡아줘."
"제가 어떻게 그걸 가르쳐요? 8기1장 (요즘의 태극1장)도 모르는데..."
"하, 또 왜 그러시나... 다 얘기 듣고 왔는데..."
그는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커피에 크림을 주욱 부었다.
"사범증 있어?"
"어허, 그런거 없다니까요, 참 내."

들리는 이야기로는 태권도에서는 공인4단이 되면 사범증이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그 대화 이후로 사람들은 '무길도한량은 태권도 공인3단이다. 사범증이 없는 걸 보면 4단은 아닌 모양.' 하는 소문이 마구마구 퍼져나갔다.
거기에 더해 '무길도한량은 태권도 공인3단 인데, 쌈닭으로 키워진 선수랜다. 그래서 품새는 하나도 모른다데...' 하는 소문까지... ㅋㅋ

일본에서 건너온 아오끼라는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는 작달막한 체구에 유도 3단, 검도 초단, 가라테 3단 라는 종합선물세트형 실력자였다.
기숙사 식당에서 첫인사를 나누면서 하는 말이,
"우리 과의 한국사람들이 무길도한량이 태권도 최고수라고 말했스므니다. 언제 한 번 기회가 되면 소중한 가르침을 주면 좋겠스므니다."
갈수록 태산이구나.
잘 하면 유도에 가라테에 검도까지 완전히 풀세트로 얻어맞게 생겼다. --;;

그는 나에게 자신의 수련하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기숙사방을 내 방 건너편으로 옮기고 날이면 날마다 복도에서 죽도를 내려치고 낙법을 연습하고 품새를 가다듬었다.
내가 지나갈라치면 내 이름을 크게 한 번 부른 후, 절도있는 모습으로 한 품새를 보여주고, 내게 90도를 구부려 인사를 했다.
"언제나 기다리고 있스므니다."
아아, 이를 어쩐단 말인가.
아니라고 말을 하면, 그는 시합을 회피하기 위한 변명으로 생각할테고...
시합을 받아들이면, 온 몸에 멍이 들도록 터지고 맞아서 죽지 않으면 다행일테고...

어느 날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복도쪽에 몰려 와있었다.
틈을 헤치고 들어가니 두 명의 검은 도복을 입은 사람들이 꿇어앉아 야구방망이를 무릎 높이에서 평행하게 들고 있었고 아오끼는 그 앞에서 차렷자세로 서있었다.
나를 보자 그는 여느 때처럼 90도로 인사를 하고,
"무길도한량이 오셨으므로 시작하겠스므니다."
라고 말한 후 앞차기 준비자세를 잡았다.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그리고, 단발마의 기합소리와 함께 그는 발목으로 걷어차서 야구방망이 두동강이를 냈다.

사람들로부터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으면서 그는 나에게 다시 90도로 인사를 했다.
나도 정중하게 90도로 허리를 꺽어 인사를 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발목을 가르키며,
"내가 세상에서 본 킥 중에서 가장 강력한 킥이었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괜찮은가요?"
"감사합니다. 사실 좀 아픕니다."
얼굴을 약간 찡그리면서도 빙긋이 웃는 그의 등을 한 손으로 토닥이며 뭔 말을 해야...
그렇지!
"아오끼상, 무술의 본래 목적은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고 자기수련에 있습니다. 누군가와 시합을 하고 싶다는 것은 그 사람을 넘어서고 싶다는 말이고, 그 말에는 은연 중에 자기가 그 사람보다 열세라는 생각이 깔려있는 것이죠."

순간, 아오끼는 콘크리트 바닥에 아프도록 털썩 무릎을 꿇었다.
"하! 제가 모자랐스므니다. 앞으로 더 정진하겠스므니다."
말 한마디로 위기를 벗어난 무길도한량은 당연히 허-허-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아오끼의 팔을 붙잡아 일으키며 등을 토닥여 주었겠지요. ^^
"아오끼상, 정말 강합니다."
이렇게 칭찬 한 마디 덧붙이면서 승부는 어물쩍 넘어간 무길도한량.
그 이후 소문은 '일본의 아오끼가 무길도한량에게 무릎을 꿇고 빌었다더라. 아마 둘이 그 전날 밤 어디 다른데 가서 한 판 붙었던 모양이야...', 이렇게 번져나갔다.

국제적으로 공인받는 태권도3단이 된 후에도 나의 마음은 그다지 편치 않았다.
다행히 그 일이 있은 후 한 6개월 뒤엔 내가 그곳을 떠나게 되어서, 마음을 바꾼 아오끼와 진짜 한 판 붙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떠나는 날까지도 무길도한량은 사실 좀 겁이 났다.
야구방망이를 부러뜨리는 그 살벌한 파괴력으로 나의 정강이뼈를 내지르면...?
아-,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쩌다 태권도의 '태' 자도 모르는 내에게 왜 이런 상황까지 벌어졌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모든 일의 시작은, 아닐 때 아니라고 적극적으로 말하지 않은 나의 희미함과 소문이 커져갈 때마다 그것을, 약간은 즐겨하던 '-체 하는 마음' 에 있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그렇게 겁나는 상황까지 갔었음에도 요즘에도 아이들이,
"아빠, 태권도 할 줄 알아?" 하면,
"그러엄. 잘 하지..." ^^

'태권도 국제공인3단이지. (요거까지 이야기하면 완전 100% 거짓말 되겠지)
아빠가 그곳 무림을 평정하고 말이야...에... 또...'
이야기로 세상을 다 정복해도 시원찮다. ^^






(2009.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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