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남

오늘이 몇일이냐?
에잉? 5월 5일이네?
오늘은 어린이날이고,
Cinco de Mayo (씽코데마요)이고,
수요일이고,
무길도한량이 출근하는 날이고,
에...또, 우리 집사람과 처음 만난 날이다. ^^
심심한데..., 옛날 얘기나 해줄테니 파전이나 하나 부쳐오련?

그날은 말이지...
새벽녘에 비가 쫘아- 하고 와서 포도를 한 번 깨끗이 쓸어내주고, 아침부터 앞이빨 하나 술렁 빠진 햇님이 함박웃음과 함께 우리집 지붕 왼쪽 처마끝으로부터 둥실 떠올랐었대.
그날은 말이지...
소개팅이구 선이구 할 것 없이 다 합하여 도합 2백여 번의 빛나는전과를 가진, 서울의 지 혼자 잘난 노총각이, 이젠 더이상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한 후 가지는 첫 만남이었대.
또 그날은 말이지...
여느 때처럼 자신의 차 르망을 끌고 나가려는 노총각의 손에 아버지께서 '오늘은 내 차로 가자.' 며 당신께서 애지중지하시던 그랜저 키를 선뜻 내주셨던 날이었다지, 아마...?

중간에 다리 놓은 집사님인지 권사님인지 하는 분의 혜안도 작용했다는 것 같지?
무슨 말이냐 하면,
젊은 사람들이라면, 또 서울을 좀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100% 확실히) 선택하지 않았을, 기가 막힌 곳을 만남의 장소로 선택했다는 것이지.
그게 어디냐고?
그 당시엔 말이지, 지금은 시냇물만 흐르는 청계천길 위로 가로지르던 세운상가니, 대림상가니 하는, 가건물 같은 상가들이 있었걸랑?
그리고 그 위에 높다랗게 지어올린 풍전호텔이라고 있었지.
그 안의 레스토랑이 바로 그 접선장소였는데, 얼마나 손님이 없었는지 총각네와 처녀네, 양가집 식구를 빼면 돈 내고 들어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 정말 집중력 높이는 장소였지.

평상시 잘 동행하지 않으시던 노총각의 두 부모님께서 그날 따라 동행하시고, 처녀쪽에서는 부산에서 상경하는 관계로 어머님만 같이 나오셨대.
지금 생각해보면, 노총각의 아버님께선 하나 밖에 없는 아들내미를 어떻해서든 기필코 장가를 보내야겠다는 절대절명의 책임감을 느끼고 계셨던 것 같아.
분위기를 잡아주시려던 당신께선 주어진 5분간의 모두발언 시간을 너끈히 소화해내셨을 뿐만 아니라 자식자랑도 하시고 상대방 호구조사까지 하시며 20분이 넘도록 열변을 토하셨대.
그러다가 문득 여지껏 한 마디 하지 않고 있던 노총각을 향해,
"어? 내가 이야기를 너무 길게 했지? 주책없이 일어서야 할 시간을 지나쳐버린 모양이다."
"아, 예-. 일어나시기에 이미 늦었습니다."^^
그 말에 그 처녀도 웃음을 터뜨렸다고 하지, 아마?

근데 말이지...
그 노총각집에는 이상한 전통이 있는지 말이야.
아주 옛날에, 노총각의 아버지께서 처음 어머니와 만나셨을 때 두 분은 4시간 동안이나 다방에 앉아 이야기를 하셨다고 하지.
아, 물론 철학을 전공하시던 아버님의 일방적인 정치와 철학에 대한 강론이긴 했지만...
그 재미없는 강의를 끝까지 정신줄 놓지 않고 다 들어주신 어머님도 대단하시지.
나중에 감상문을 제출했는지 안했는지 그것까진 알려진 바는 없어.
뭐, 하여간 그 노총각도 그 처녀를 무려 일곱시간이나 붙잡고 있었다더구만.
물론 밥도 사멕이고 간식도 사주면서 말이지... ^^

고매한(?) 인격 때문이었는지, 해박한(?) 지식 때문이었는지, 화려한(?) 언변 때문이었는지, 세련된(?) 매너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수려한(?) 용모 때문이었는지...
여하튼, 부산의 그 처녀는 알게 모르게 노총각의 분위기에 휘말려 들게된 이유를 15년이 지난 지금도 잘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우뚱하는 일이 잦다고 해.
"내가 왜 그랬을까...?"
ㅎㅎㅎ200번이라는 관록이 그저 쌓이기만 했다고 생각하시남? ^^
하여간 그들은 예닐곱번을 서울과 부산을 오가면서 만남을 가진 후, 개천절을 기해 결혼식을 올리고 잘 살았다고 하지, 아마...?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흐르고, 흘러간 강물은 다시 잡을 수 없다는데...
그 뺀들뺀들 매끈매끈한 얼굴들 위로 벌써 몇 군데 주름이 생기기 시작하고, 하루에 먹는 치료약만 해도 한 주먹은 되고 말이야.
한 번의 만남이 그 서울 노총각에게, 혹은 그 부산 처녀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잘 지은 시로 한 번 표현해보자.
내가 그의 이름을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중략)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김춘수, '꽃' 중에서
아, 근데 부친다던 파전은 아직도 시작도 않았나?
쩝...
(2010.05.06)
제 무덤 지가 팠지. 그 놈의 콩깍지,우헉. 여자 팔자,뒤웅박 팔자. 다----, 나와는 상관없는 말들. 오직 너 뿐이야<333
답글삭제아직도 시간 많이 남아있지?
답글삭제죽도록 충성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