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오십부터래...

인생은 오십부터래... ^^

2011년 7월 12일 화요일

라면블루스

라면 블루스










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면 라면과 스프를 뜯어넣는다.
준비했던 납작한 가래떡 몇조각, 당근 채로 썬 것 약간 양과 통파를 송송 썰은 것을 한꺼번에 미끄럼 태우듯 냄비 안으로 밀어넣고 잠시 관망모드로 들어간다.
끓던 것이 일순 잦아들었다가 면발 사이로 조금씩 물방울들이 자글자글 올라오기 시작하면, 고급형 라면 끓이기의 가장 중요한 결정포인트에 도달한 것이다.

계란을 통으로 넣을 것인가?
아니면 깨서 휘젓고 뒤에 밥 말아먹을 국물을 도모할 것인가?

나는 우리나라 인스턴트라면과 같은 해에 태어난 자랑스런 라면인(人)이다.
이전의 세대들은 봄보리가 수확되기 전까지의, '보릿고개' 라는 춘궁기를 버티느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물론 내가 태어나자마자 그 악명 높은 보릿고개가 그날 이후 갑자기 써억 물러간 건 아니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미국정부마크가 찍혀있는 푸대자루에서 밀가루를 퍼내어 허구헌 날을 수제비와 칼국수를 만들어 먹고 있었다.

단지 어머니께서 어쩌다 한 번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삼양공업에 견학 다녀오시면, 개별포장 없이 20개의 라면이 한 봉지에 든 '덕용 라면' 이라는 것을 타오시곤 하셨다.
그러면 그 날은 온동네에 고기국물 냄새 가득 풍기는 별식의 날이었던 걸 기억한다.
석이네도 순이네도 모두의 얼굴에 기름이 좌악 흐르고 집집마다 웃음꽃이 피는 것이었다.
단돈 십원 하던 라면 한봉지도 마음껏 사먹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세월은 또 그래 그래 흐르고, 우리집은 형편이 많이 나아졌을 무렵이었다.
그 당시 최고의 코미디언 막둥이 구봉서와 후라이보이 곽규석이 형제로 나오는 텔레비젼 광고가 나타났다. (존칭생략^^)
우리네 국어교과서에 나오던 의좋은 형제를 패러디 해서 라면선전을 하는 것이었는데, 이 노래 마저도 우리들 사이엔 큰 인기가 있었다.

형님 먼저 드시오, 농심라면 (먼저 아우 곽규석이 라면그릇을 구봉서에게 밀어주며)
아우 먼저 드시오, 농심라면 (그러면 형 구봉서가 아우 곽규석에게 라면그릇을 되밀면서)
형님 먼저~~~ (다시 형쪽으로 밀면서)
아우 먼저~~~ (다시 아우쪽으로 밀면서)
그럼, 제가 먼저. ^^ (곽규석이 자기쪽으로 끌어당기면 구봉서는 아쉬워한다)
농심은 천심! 롯데라면 좋아!

그 때까지 까맣게 라면의 존재를 잊고 살았던 사람들에게 큰 쇼크를 던져주었다.
물론 그 전에 삼양라면도 있었고, 그 뒤를 따라나온 롯데 소고기라면도 있었지만,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며 다가온 라면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농심라면을 찾게 되었는지, 몇 년 후엔 회사이름도 결국 농심으로 바뀌게 된다.

한번은 할머니댁에 놀러갔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모두 교회에 갔는지 집안이 텅 비어 있었다.
우린 TV가 없던 터라, 오랫만에 일요일 아침 '웃으면 복이 와요' 재방송에 취해 이불 위에서 뭉그적 거리다보니 배가 출출해졌다.
이 집은 무얼 해먹고 사나~?
이리저리 부엌을 수색하다보니 찬장 속에, 그 유명한 농심라면이 하나 있다.
앗, 나에게도 이런 것을 먹어볼 기회가 오다니... ^^
라면과 별로 친하지 않던 터라, 먼저 봉지에 그려진 '조리방법' 을 유심히 두어번 정독하고...

어라...?
아궁이에 있어야 할 연탄 화덕이 보이질 않았다.
이리저리 둘러보니 연탄화덕이 부엌 뒷마당에 나가 덩그마니 홀로 서있었다.
아마도 할머니께선 더우니까 안방 연탄불을 빼려고 하셨나보다...
하여간, 라면봉지 지침대로 조그만 냄비에 물을 담아서 연탄 위에 올려놓는다.
성공적으로 라면과 스프까지 잘 넣고나자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3-5분간 끓이기만 하면...오우케이. ^^
그동안 잠시, 보던 '웃으면 복이 와요' 를 계속 봐주기로 한다.

구봉서, 배삼룡, 이기동, 권귀옥, 이대성, 남철, 남성남, 양헌, 양석천, 김영림... 또 누가 있나?
여하간 재치와 해학에 빠져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잠시 후, 어디선가 뭔가 타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헤... 어느 집에서 또 밥 태우시는군. ^^
타는 냄새는 점점 더 진해지고, 급기야 옆집에서 담너머로 누군가를 부르기 시작한다.
"아줌니! 뭐 타요!"
소리치던 그 남자가 결국 거의 부르짖는 상태에까지 이르자, 난 이렇게 생각한다.
하-, 도대체 어떤 집이 이리도 밥을 태운단 말이냐? 저 아저씨도 참 웬만하면 그만 모른 체 하고 말지... 끙.

잠시 후, 마당으로 좍좍 쏟아지는 물소리를 듣게 되자, 나도 조금은 궁금해져서 부엌문을 살짝 열고 내다보......!!!
내가 끓이던 라면이 물이 졸아들고 면발까지 모두 타다 못해 냄비 바닥까지 새카맣게 된 상태로, 담 너머에서 옆집 아저씨가 호스로 뿌려대는 물벼락을 맞고 있었다.
아흐흐흐흐....
농심라면을 입에 대보지도 못하고 몽땅 버리게 한 내 스스로가 원망스러웠기도 했고, 이웃집 아저씨에게 창피해서 나가보지도 못한 채, 난 땅바닥에 사정없이 뒹구는 냄비를 넋을 잃고 바라만 보았다. --;;

우리에게 있어 라면이라는 것은 참 특별한 존재였던 것 같다.
언제나 싼 값에 허기로부터 구원해주기도 하고, 밥 보다도 과자 보다도 더 좋은 기호품이기도 하고, 여러가지 재료를 곁들여서 언제라도 항상 식탁을 풍성하게 해주는 절대 식품.
늦은 밤 공부에 몰입하던 친구가 라면을 보고 스며나오는 미소.
공장에서 야근하던 친구가 휴식시간 중 따끈한 라면을 들어올리며 짓는 미소.
그리고 전방 GOP 에서 경계근무 중 야식으로 나온 다 풀어진 라면을 먹으며 짓던 눈물.
라면이 지금의 우리나라를 만들었다.

더욱이 라면과 우리의 김치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 것은 원산지 일본에선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일본 아카사카 뒷골목 시장의 허름한 식당에서 맛본 오리지널 라면의 구수한 국물을 먹으면서도 떠오르던 것은.... 잘 익은 배추김치 한 젓갈.
이국에서 맛 없는 외국라면이라도 겨우 끓여놓으면, 간절했던 것.
라면 한 그릇에 김치 한 보세기.
그 다음날 얼굴이야 호빵만해졌던 쟁반만해졌던 신경쓸 바 아니었다.

70년대 말 종로통이 수 많은 학원으로 북적일 때, 피맛골 여기저기 숨어있는 라면집들.
국수처럼 불려서 곱배기로 만들어주는 곳도 있었고, 끓는 물에 딱 일 분만 집어넣어서 면발 꼬들꼬들 하기가 철사 같은 곳도 있었고, 후식으로 고구마 맛탕 두 조각 주는 집도 있었고...
나름대로 라면전문집으로 두각을 나타내려고 노력하는 집들도 있었다.
떡라면, 만두라면, 김치라면... 등등의 파생형들도 많이 등장했다.
심지어는 금기시 되던 콩나물 라면까지...

하지만 중요한 변화는 거기에 있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고추가루도 더 뿌리고, 청양고추도 쪼개넣고... 멋 모르고 먹는 사람 혼쭐나게 만들도록 라면은 더 짜고, 더 매워져서 더 자극적인 음식으로 변해갔다.
마치 우리네 인심이 그렇게 변하듯...
맵고 짜지 않은 라면은 점점 더 시장에서의 입지를 잃고...
음식에 맞춰서 사람의 인성도 변한다는데, 우리는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 것일까?

...라면 먹고 국물에 밥 말아 먹기로 하자.
계란을 풀어 넣자, 기다렸다는 듯이 딸내미가 고춧가루통을 내게 건네준다.
물끄러미 고춧가루통을 바라보고 있자 딸내미가 재촉하듯 통을 디민다.
"오늘은 그냥 고춧가루 치지 말고 먹기로 하자."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지만, 난 이미 마음을 굳히고 만다.
구수했던 옛날 라면의 맛을 그리워 하며...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던 구수한 우리네 정을 그리워 하며...




(2009.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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