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우런 바탕에 푸른색을 두른 버스가 반환점을 돌아 정류장으로 들어오면, 줄 서있던 아이들은 총알처럼 버스에 뛰어올라 자신이 선호하는 자리를 차지한다.
맨 뒷자리로 정신없이 내닫는 아이들도 있지만, 역시 가장 인기가 좋은 곳은운전사 맞은편 창가 제일 앞1번, 2번좌석이다.
그마저 놓치면 그 다음은 운전사옆 엔진뚜껑 부분이 명당자리이다.
큰 앞유리창을 통해 전반적으로 돌아가는도로상황을 잘 조망할 수도 있고, 운전사가 운전하며 하는 행동들을 잘 관찰할 수있다는 점이 아이들의 마음을 끄는 것이었다.
소년은버스 안에서뛰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가장 먼저 버스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1번, 2번 좌석은 놓치고 대신 엔진뚜껑 위에 자리를 잡는다.
엔진뚜껑은 누비커버가 깔려있음에도 벌써 따끈따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여름이면 몰라도 겨울이면 가장 인기있는 자리가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물론간혹 냉각수가 터져 피어오른 수증기에 화상을 입는 경우도 있었고, 재수 없이 거친 운전습관을 가진 운전사를 만나면 굴러떨어지지 않도록 좌석에 난 손잡이를 꽉 잡아야 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여기서 그 당시 한 때 유행했던썰렁한 우스개도 하나 짚고 넘어가자.
버스 맨 뒷좌석 가운데에 앉아있던 아줌마.
정신없이 졸다가 운전사가 급브레이크를 끼이익 밟는 바람에 그만 떼굴떼굴 굴러서 엔진뚜껑까지 굴러가 턱 하니 그 위에 앉아버렸다.
모든 사람의 눈길이 쏠리자, 창피해진 아줌마, 운전사를 향해,
"나 불렀씨유?"
피식 웃던 운전사, 파란 신호등에 부아앙- 하고 버스를 출발시킨다.
준비도 없었던 아줌마는 다시 떼굴떼굴 굴러서 맨뒤 가운데 좌석으로 돌아왔다.
다시 모든 사람이 쳐다보자, 아줌마 하는 말이,
"운전사가 나 안불렀대."
소년이 탄 영인운수 122번은 봉천동 낙성대에서 출발하여 봉천동 사거리를 향하여느긋하게 그리고 점잖게 운행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봉천동 사거리쯤 가면 122번은 숙명의 라이벌을 만나야 한다.
신촌운수 92번.
노선이 거의 같은 관계로 이 둘의 관계는 항상 경쟁일 수 밖에 없었다.
한 대가 정류장에 서면, 뒤에 따라온 라이벌은 그 뒤에 서는 것이 아니라, 추월하여상대방 버스의 앞으로 끼어들며 정차하여 승객을 내리고 태우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두 회사의 버스 운전사들은 곧잘 창문을 열고 육두문자를 교환하기도 하고 버스 안내양들도 서로 감자먹이기가 예사였다.
운명의 봉천고개에 도달하면 두 버스는 죽을 힘을 다해 실력을 겨눈다.
지금은 모두 잊혀진 이름들이지만 하동환자동차, 신진자동차에서 나온 이 버스들은 푸티티티-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매연을 꽤나 뿜어대던 덕분에 행인들에게도 욕 좀 먹었다.
올라가던 탄력으로 언덕을 반 쯤 오르고 나면, 좀 더 힘 좋은 기어로 한 단 내려주어야만 하는데, 그 타이밍이 두 버스 운전사의 실력을 가늠하는 척도였다.
소년을 비롯한 아이들도 주먹에 땀을 쥐며 우리 버스가 이기기를 응원한다.
92번만은 이겨야 해!
네가 잘났네, 내가 잘났네 하며 경쟁하던 두 버스들이갑자기 꼬리를 내리고 오른쪽 차선으로 붙어가기 시작한다.
바로 뒤에 55번 창진운수의 힘좋은 GM Korea버스가 상향등을 번쩍이면서 따라 붙었기 때문이었다.
"게 비키거라, 느림보 똥차들아~"
55번은 두 버스를 추월하여 저만큼 앞에서 오른쪽 차선으로 옮겨 탄다.
그리고 숨돌릴 틈도 없이 그 뒤를 따라 333번이 쏜살같이 122번, 92번을따라마시고 앞서 있던 55번 마저 추월하면서 언덕 너머로 사라져버린다.
삼화교통 333번은 버스로는 처음 선보인각진 스타일에, 강한 엔진을 갖춘최신의 아시아 P9AMC 버스로무장하여 당할 자 아무도없는 최강의 전력이었다.
좋은 버스들에 추월당한 122번과 92번 버스 운전사들은 서로 겸연쩍은 모습으로, 봉천고개 꼭대기에 위치한 다음 정류장에서 슬몃 농담으로 분위기를 전환시킨다.
"뭐가 그리 급한겨~?"
"아- 좀 천천히 좀 가-"
그 다음부턴 괜히 운전사들은 서로 양보하면서 가기 시작하고... 아이들의 맥도 풀려버린다.
긴장이 풀어지면서 아이들은 하나 둘씩 졸기 시작하고, 버스는 상도동을 지나면서 대학생들도 많이 타고 노인들도 많이 타기 시작한다.
출입문 근처에 있는 아이들은 부리나케 일어나 노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기도 하고, 다른 아이들은 대학생들 가방을 자신의 무릎 위에 받아주기도 한다.
겨울 어느날엔진눈깨비가 펑펑 새벽부터 내리더니, 모든 버스들이 타이어 체인을 휘감기도했지만 급기야 봉천고개를 넘어갈 수 없는 상태가 된 적도 있었다.
힘 좋은 55번 창진운수들 마저도상도동 숭전대 앞에서 봉천동으로 넘어가는 꼭대기에 있는 커브에서 반쯤 돌아앉아 길을 가로막아 버렸다.
아이들이 탄고물딱지 122번이나 92번 버스들은 시도도 못해보고 언덕이 시작되는 숭전대 앞에서 그냥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유리창에 들러붙는 진눈깨비를 밀어내던 유리창 와이퍼도 무척이나 힘들어 보이고...
그렇게 한 30분을 기다렸나 보다.
한 대씩 한 대씩 포기하고 돌아가는 버스들을 지켜보며 껌을 질겅질겅 씹던 운전사가 손톱 뜯는데 열중해있는 안내양에게 말한다.
"얘-, 김양아, 우리도 돌아가자."
돌아가다니...?
그럼 우리는...?
결국 모든아이들 손에는 회수권 한장씩이 쥐어진채로 안내양으로부터 하차를 종용받았다.
122번이 우릴 버리다니...
종점이 학교 정문 앞이라 항상 우리 학교버스처럼 생각하던 122번 버스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마음에 아이들은 쏟아지는 진눈깨비 속에 망연자실 서있을 수 밖에 없었다.
소년이 진눈깨비를 헤치고 자신의 교실에 도착한 것은 10시가 훨씬 넘어서였다.
완전히 젖어버린 교복을 벗어놓고 친구들이 마련해준 석탄난로 옆좌석에 앉은 소년의 몸에서는 꼬물꼬물 수증기가 솟아났다.
벌겋게 달구어진 난로 위로 층층히 쌓인 도시락에서 김치냄새가 풍겨나고 있었다.
승객들을 쏟아내고 그냥 돌아가버린버스를 생각하는 동안 자신의 몸이 차츰 따뜻하게 데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소년은 차츰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의 꿈에선 수 많은 버스들이 신나게 질주하고 있었다.
소년도 아시아 P9AMC 모델로 바뀐 122번을 몰고 기아 변속 한 번 없이 봉천고개를 올라갔다.
55번도, 92번도, 심지어는 333번도 부드럽게 추월하면서 조수석 너머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브레이크 한 번 밟지 않고 낙성대에서 소년의 집이 있는 노량진까지 버스는 내달렸다.
어디선가 슬금슬금 밥타는 냄새가 풍겨왔다.

(2009.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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