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에는 맑은 바람 뜨거운 햇볕
빛깔도 곱게 오곡을 키워
그 곡식 고루 먹고 자라는 우리
넘치는 영양에 살찌는 살림
쑥쑥 키가 큰다 힘이 오른다
혼식 분식에 약한 몸 없다
하얀 국수가락 맛 좋은 빵과
고소한 잡곡밥 그 맛을 알면
해와 같이 밝은 마음 튼튼한 육체
우리도 넉넉히 살 수 있어요
쑥쑥 키가 큰다 힘이 오른다
혼식 분식에 약한 몸 없다
(3절 생략)
점심시간은 항상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활기찬 노래와 함께 시작되었다.
마지막 5분을 견디지 못하고 졸기 시작했던 훈이도, 4교시 내내 도시락을 끌어안고 있던 종언이도,점잖은척 폼 잡던 광옥이도, 모두 번개처럼 도시락을 꺼내 들었다.
"야, 너 반찬 뭐야?"
"캬, 끝내주는 김치지. 넌 뭐냐?"
"난 감자조림."
"난 고추장 멸치조림이다."
신나게 서로 서로 반찬을 보여주며 왁자지껄하는 소리, 양은 도시락 뚜껑 여는 소리, 그 짧은 사이에총알처럼 화장실 갔다가 돌아오면서 환호하는 소리...
땅.- 땅.- 땅.-
"이놈들, 웬 시장바닥이야? 모두 조용히 앉아!"
어느새 들어오셨는지 담임선생님이굵은 봉걸레자루로 만든'정신봉' 으로 교탁을 세 번 내리치시며 소리지르시자 갑자기 교실 전체는 싸늘한 정적이 맴돌았다.
앞좌석에 있다가 뒷줄까지 원정갔던 기준이는 황급하게 제자리로 돌아간다.
"모두 도시락 뚜껑에 밥 한 숟갈씩 덜어놓는다. 실시!"
소년은아뿔싸 하는 마음에 당황하여 황급히 도시락 뚜껑을 닫았다가, 앞에서부터 검사하면서 오시는 담임선생님을 보고 뚜껑을 다시 연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밥을 한 덩이 떼어서 뚜껑으로 옮겨놓는다.
소년의 얼굴이 빨개진 것을 본 옆좌석의 광옥이가 조용히 자기 밥 한 덩이를 덜어 소년의 뚜껑에 올려놓는다.
소년은 도리질을 하며 광옥이의 밥덩이를 다시 광옥이 도시락으로 돌려보낸다.
"넌 뭐냐?"
담임선생님이 정신봉으로 그의 책상을 콕콕 뚜드리며 물으신다.
전 학급의 눈동자들이 그의 도시락 뚜껑으로, 그의 빨개진 얼굴로 쏟아졌다.
"잊었습니다."
"뭘 잊어, 임마! 너, 전번에도 잊었다고 했잖아?"
언성에서 뿜어내는 뜨거움이 느껴졌다.
"잊었습니다."
"그래, 잘 잊는 똥대가리에게는 약이 있지. 앞으로 나가!"
"매일 검사할거니까 알아서들 해!"
담임선생님이 학급을 벗어나자 마자 교실은 다시 평상시의 즐거운 점심시간으로 돌아갔다.
몇몇 친구들이 소년에게 와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를 해주었다.
"야, 야. 잊어라 잊어."
"그러길래 광옥이꺼 왜 안받았어?"
정신봉으로 한차례 타작을 받은 엉덩이가 쓰렸다.
"그래, 잊어버리고 밥이나 먹자."
소년은 반찬통을 친구들에게 밀어주고는 도시락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그래? 잊어버리고 밥이나 먹자니까..."
"아니야, 너넨 맛있게 먹어라. 난 못먹겠어."
소년은 자리를 벗어나 교실 맨 뒤에 있는 쓰레기통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도시락에 담겨있는 밥을 한 알도 남김없이 쓰레기통으로 쓸어넣었다.
그 후, 우리 학급의 30% 혼식 실천율은 매일 100% 를 이루게 되었다.
보리쌀 셋에 쌀 일곱.
담임선생님은 기뻐하셨고, 교장선생님도 기뻐하셨고, 시찰나오신 장학사님도 기뻐하셨다.
두어 달 후엔 혼식우수학급 표창장도 받았고, 지도시범사례로 보고도 되었다.
담임선생님은 더더욱 신이 나서 나중엔 쌀 반 보리 반을 권장하게 되었다.
소년은 점심시간 시작을 알리는 노래가 시작되면 항상 운동장가 벤치로 나가책을 읽었다.
책 속에 밥이 있었다.
예전 시골의소년네 농장에서는 쌀을 먹지 않았다.
그저 시커먼 통보리를 삶아서 다 같이 빙 둘러앉아 총각무우김치도 척 하니 얹어먹기도 하고 된장을썩썩 비벼서 상추를 싸먹기도 하고 그랬다.
가끔 조팝이나 수수밥이라도 먹게 되면 그것이 별미였다.
부모님도 가족들도 일꾼들도 모두 그렇게 먹는 것이 예사였다.
그런데...
소년에겐 보리를 소화시키는 것이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들은 보리밥을 먹고 두어 번 뿌웅-한 후 돌아서면 벌써 소화가 다 되었는데, 소년에겐 이 뿌웅- 이 잘 되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배출이 안되고 자꾸 허리띠 윗쪽으로 남산만큼 가득 차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서 소년은 보리밥을 피하고만 싶었다.
유일한 쌀밥, 할아버지 진지의 쌀밥으로 자꾸만 숟가락을 뻗치고만 싶었다.
오랫만에 우리 부부는 외식을 한답시고 근처의 한식집을 찾았다.
"뭐, 먹을까?"
누우런 나무 테이블에서 똑같이 누우런 의자를 끌어내며 내가 물었다.
"글쎄, 뭐 먹을까?"
모처럼의 한식집이라서 인지 아내도 자리에 앉으며 두리번 두리번 벽 위에 붙어있는 메뉴판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다.
"이야, 이 집 보리쌈밥정식이 있네?"
항상 건강한 먹거리를 생각하는 아내의눈에띈 메뉴.
"무엇! 뭐 그딴 걸 돈 주고 사먹을 생각을 해?"
아내를 핀잔하는 나의 목소리가 좀 컸는지, 돌아보는 사람들도 있다.
"아니, 보리쌈밥정식이 어떻다고 그러슈?"
......
그 날, 우리의 외식이 성공적이었는지 재앙스러웠는지는 짐작에 맡기도록 하자.
지금내가 후회하는 것은 먼 옛날 그 어느 누구의 발랄한 생각에 의하여 개인의 먹거리를 제한하던 그 나쁜 버릇을 나도 똑같이 배워서 아내에게 쓰려했던 사실이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선택할 권리가 있는데 말이다.
좋아하는 것만 골라 먹으며 살기에도 인생은 참 짧은데......
얼마전엔 쌀이 남아돈다고 쌀 좀 열심히 먹으라고 또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더만......^^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2009.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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