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길도로 가는 길

고속도로로 접어드는 오르막 램프를 보면서 조수석에 앉은 큰애에게 지시한다.
에어콘 꺼!
3단으로 가슴 시리도록 찬 바람을 불어내던 에어콘이 단박에 낼숨을 멈춘다.
엑셀을 깊게 밟아주자 고속도로 진입램프의 오르막을 오르며, 밴은 다른 차에 뒤처지지 않도록 숨을 컥컥대면서도 스피드를 한눈금 두눈금 올리기 시작한다.
45...50...55 마일 정도에 바늘이 올라가자 다시 지시를 내린다.
켜!
큰애는 재빠른 동작으로 에어콘의 조절놉을 따다다닥 돌려서 최대풍량으로 틀어준다.
쓔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시원한 바람이 얼굴로 몸으로 쏟아진다.
어-- 숨 안쉬고 버티느라 힘들었다.
아이의 한마디가 모두를 웃게 만들었다.

우린 지금 무길도를 향해서 가고 있다.
근 4년만의 무길도로의 귀환을 앞두고 사전 정지작업차 가는 길이다.
7년전 무길도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가 떠올랐다.
'Good Camping Ground' 라는 인디언의 단어에서 유래된 이름을 가진 바닷가 조그만 마을.
아는 이 하나도 없는 낯선 곳이었지만, 일년의 절반은 이슬비로 젖는 곳이었지만 우리는 아주 아주 오래전부터 인디언들이 내렸던 평가에 신뢰를 가졌다.
틀림없이 살기 좋은 동네일거야...
그리고 바닷가로 길게 쭉 뻗어내린 내리막길을 들어서면서 진청색 푸르름으로 잔잔하고 넓게 펼쳐진 아름다운 바다를 보았을 때의 푸근함은 그 모든 것을 설명하고도 남았다.
무길도의 바다는 어머니와 같았다.
그 곁에서 우리는 꿈을 키우고 자신감을 키우고 아이들을 키웠다.

3년 후 무길도의 품안에서 키우고 다져왔던 꿈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우린 3400마일을 달려 '후라이팬 자루'로 달려갔다.
그 길은 이젠 정말 무언가가 이루어지는구나 하는 뿌듯한 마음 반, 우리를 성장시켰던 무길도를 떠나는구나 하는 아쉬움 반...
배웅하는 사람 하나 없을 정도로 숨가쁘게 달려만 왔던 생활이었지만,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대한 희망이 모든 것을 덮어줄만큼 크고도 남을 정도였다.
자, 이젠 정말 고생 끝 행복 시작이야.
화물차에 이삿짐을 실어보내고, 또 한번의 큰 소리로 식구들을 들뜨게 만들며 넘던 '비 더 많이 옴' 산자락은 점차 짧아지는 초겨울의 오후 해로 벌써 어두컴컴해지고 있었다.

축구 국가대표선수인 곽태휘의 마음이 그랬을까?
그는 대표팀 부동의 센터백이었다가, 월드컵 출전 엔트리 마감 불과 몇 일을 앞두고 불의의 부상을 당해 벼르고 별렀던 남아공행이 좌절되고 만다.
'후라이팬 자루'의 갑작스럽고 어이없는 자격요건 변경으로 인해, 그곳에서 1년반의 시간을 인턴생활에 쏟아부었던 집사람의 피와 땀과 정열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 되고, 국가고시를 불과 얼마 남기지 않고 있던 그녀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이젠 어떻게 하지?
이젠 어떻게 하지?
잃어버린 꿈에 대한, 빼앗겨버린 미래에 대한 절망과 공포와 암울함이 모두를 짓눌렸다.
무길도로 돌아가자.
돌아가면?
돌아가서 다시방법을 찾아보고 다시 계획을 세우고...
다시?

'후라이팬 자루'에서 다시 3400마일을 달려 돌아오는 길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좌절, 뺏겨버린 기회, 분노, 외국인의 비애, 잃어버린 5년, 날려버린 올인, 슬픔...
눈이 마주칠 때마다 서로 웃어주고 손을 꼭 잡아주었지만, 달리는 차창을 통해 바라보던 시야가 자꾸만 뿌옇게 흐려지던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헛헛함으로 침잠해지는 나의 마음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집사람의 마음이야 오죽 했을까...
돌아오는 그 길은 험하고 어렵고 지치고 재미없는, 긴 드라이브였다.
무길도에서 조금 떨어진, '아름다운 경치' 라는 마을에 여장을 풀고 한 달쯤 지났을 때 '후라이팬 자루'는 변덕스럽게도 집사람에게 그녀가 자격요건을 충족시켰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그날 난 아내를 업어주었다.
장하다, 대한건아!
그녀는 곧 국가고시를 통과하고 몇달 후 되찾은 미래를 위해 '후라이팬 자루'로 날아갔다.
돈 벌러... ^^

그리고 우리는 이젠 무길도로의 귀향을 계획하고 있다.
그곳에 가면, 따뜻함과 안온함이 있고 우리를 가족으로 생각하는 친구들도 있다.
게다가 좀 비좁기는해도, Douglas Fir 의 부드러운 잎 사이로 바람소리를 듣을 수도 있고 속삭이듯 나뭇가지에 부딪히는 빗소리를 들을 수 있는 조그마한 우리집도 있다.
'아름다운 경치' 에 있는 학교들이 더 좋기는 하지만, 무길도에 가서 5년을 살면 한사람의 대학교 공납금을모을 수 있다는 점도 대단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죠-쑤, 에어콘 끄고~.
옛써.
오르막길에서 지나치게 늦은 속도로 언덕을 기어오르고 있는 차를 피해 추월선으로 나선다.
얼마전 10만 마일을 주파했지만, 에어콘만 끄면 우리차는 아직도 씽씽하니 언덕을 쉽게 차고 오른다.
아직 한 5년은 더 타야한게로 무리하면 안되지라... ^^
OK, 다시 켜고~.
옛써.
아빠, 무길도 가면 우리 자주 가던 아이스크림집에 가서 아이스크림 사줘야 돼.
거럼, 거럼. 당연히 도장찍고 와야지. ^^

(2010.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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