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아직 안죽었어!

형광빛 연두색 공이 네트를 넘어서자 준비자세에 들어가 있던 온 몸의 신경들이 하나씩 둘씩 긴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지켜져왔던 매뉴얼처럼, 하나 하나 감지되어오는 신호에 따라 몸은 예정된 수순에 의해 준비된 동작을 시행한다.
눈을 공에서 떼지 말고...
다가오는 공을 향해 왼손을 거머쥘 듯 내뻗으며 조준을 하고...
뒤로 제껴졌던 오른팔을 허리 높이로 스윙하며...
내딛는 왼쪽 무릎의 위치에서 공을 정확히 맞춰주고...
정면 눈높이에서 왼손으로, 타격 후 스윙으로 올라오는 라켓의 목을 잡아준다.

팡!
라켓의 hot spot 에 정확히 타격된 공은 나즈막하고 빠른 포물선을 그리며 상대방의 1m 정도 전방의 위치에 바운스된다.
(나이스 샷!)
상대는 치기 좋은 위치로 다가오는 공을 다시 똑같은 프로세스를 거쳐 돌려보낸다.
팡!
정면에서 오른쪽으로 약간 벗어난 위치로 날아오는 낮은 볼.
재빨리 볼을 따라 한걸음 오른쪽으로 움직이며 무릎을 낮춰 공을 맞춰준다.
팡!
네트를 스치듯 날렵하게 일직선처럼 넘어가는 공에 희열이 솟는다.
(좋았어.나 아직 안죽었다구.)
팡!
팡!
핑......척! (공이 라켓에 빗맞은 후 네트에가서 꽂히는 소리)^^

오늘은 방학을 맞은 아이들과 아침 테니스를 시작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방학동안 날씬하고 건강한 몸을 만들고자 하는욕구가 있었고,
나는 나대로... (에휴~) 이유가 있었다.
거의 1년이란 시간을 좌골신경통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눕고, 엎드리고, 또 옆으로 눕고... 조금 걷고... 다시눕고, 엎드리고...조금 앉아있고... 하는 식으로 보냈더니,
당뇨 치료차 운동과 다이어트로 제법 보기좋게 만들어 놓았던 몸이 망가져버린 것.
눈이 가늘어지도록 양볼에 두덕두덕 붙은 살은 그래도 후덕해보이기나 하지만, 완만한 원을 그리며 솟아오른 배둘레 햄이 어느 순간 배꼽이라도 뽕! 하고 튀어나오지 않을까 걱정될 수준에 이르렀다.
남들은 씩스팩 붐에 휩싸였는데, 나만 홀로 원팩 통을 유지하는 꼴이다.
게다가 양다리는 왜 이렇게 가늘어졌는지...
제법 볼만하던 근육들은 다 어디가고 수수깡처럼 가느다래진 두 다리는 묵직한 상체를 받치느라 참으로노고가 많다.
어이 그 뿐만 이랴?
결국 운동부족으로 인해 이제 더 이상은 나의 걱정거리가 아니라고 생각되었던 고혈압과 당뇨가 자연스럽게 다시 돌아왔으니... --;;

절대절명의 상황에서 오기는 일어나는 법. ^^
아자 아자 아자 아자자자자!
기합소리 한번 크게 외치는 가운데 1년만에 테니스코트에 두 발을 디뎠다.
공이나 맞출 수 있을까?
공을 쫓아갈 수는 있을까?
얼마나 버티고 움직일 수 있을까?
녀석들은 이제 중3과 고1이 되는, 초절정 체력을 갖춘 막강 신형엔진들이다.
오랫만에 운동화를 신고 나선 나를 일견 걱정도 해주면서, 일견 넘보려는 수작들이 눈에 띈다.
아빠, 괜찮겠어?
글쎄, 해봐야지...
나 스스로도 작아지는 기분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녀석들도 1년여 동안 제대로 테니스를 친 적이 없다는점이 약점이다.

약간의 몸풀기 준비운동 동안 그들은 키득대며 의기양양하다.
예전에 하던 식으로, 맞은편 코트에 두 녀석을 세우고 이쪽 코트에 나 혼자 서려고 하자, 녀석들은 걱정 아닌 걱정을 하며 웃는다.
You'll be OK like that?
야, 임마. 아빠 걱정 말고 네 걱정이나 해라.
그리고 우린 테니스를 치기 시작했다.
공이 가고, 공이 오고, 다시 공이 가고, 오고, 가고...
그리고 나의 볼들이 녹슬지 않은 상태로 잘 맞아나가는 것을 확인하자 기가 살아난다.
둘째야, 공을 끝까지 봐야지.
첫째야, 앞무릎 근처에서 공을 맞추란 말야. ^^
아무도 없는 테니스코트에 두 틴에이져를 압박하는 무길도한량의목소리가 울려퍼진다. ^^
하지만 시간이 한시간쯤 되어가자, 땀은 비오듯 쏟아지고, 종아리가 당기기 시작한다.
엔드라인 중앙에서 치면서도 코너까지 뛰어가지도 못하는 체력적 한계도 발견이 된다.
헥, 헥...
그래도 내가먼저 지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 ^^;;
왜?
난 강한 아버지니까... ^^

테니스 코트에서 돌아오는 길은 허리와 다리에 약간의 통증이 살아나는 부담스런 길이었다.
허리가 다시 도지는 것은 아니겠지? 하는...
그 약간의 불안감이 다시 테니스를 치며 느꼈던 그 희열을 가릴 순 없었다.
그래, 이제 조금씩 다시 시작하는거야.
다시 예전처럼 강한 모습으로 돌아가는걸 포기하지 말자.
그리고 이렇게 큰 소리로 말하는거야.
나 아직 안죽었다구!

(2010.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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