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오십부터래...

인생은 오십부터래... ^^

2011년 7월 11일 월요일

그 여름날의 희망가

그 여름날의 희망가








그날도 골목길 어귀 이발소 모퉁이에 달린 삼색표시등은 느릿느릿 돌아가고 있었다.
길 한편 구멍가게 앞 나무의자에 앉아 한쪽 다리를 틀어올린 노인네는 남방셔츠 앞자락을 풀어헤치고 땀 난 겨드랑이 쪽으로 부채바람을 보내고 있다.
두 눈썹 사이에 깊게 그어진 내 천(川) 으로 미루어 그가 인내심을 발휘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길 가장자리 하수도에서는 퀘퀘한 냄새가 슬금슬금 피어올랐다.

소년은 골목에서 목을 쭈욱 빼내어 적정을 살핀 다음 다시 골목 안으로 몸을 숨겼다.
바지 주머니 속에서 꼭 쥔 주먹 안에는 성웅 이순신장군이 새겨진 동전이 있다.
가만히 주먹을 꺼내어 펼쳐보고 재삼 동전이 그대로 있음을 확인한다.
그리곤 다시 주먹을 꼭 그러쥐어 가슴에 얹고 하늘을 향해 입술을 꼬옥 깨문다.
뜨거운 팔 월의 태양이 소년의 눈을 아리게 만들었다.

구멍가게의 반쯤 열다만 생철문엔, 문 마다 붉은 페인트로 순서대로 숫자를 써놓았고, 그 밑으로 역시 붉은 페인트로 크게 '담', '배' 라고 써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짝 문엔, '복', '권' 이라고 써있었다.
복권.
주택복권!

'저소득층 주거안정사업 지원을 위해 정부에서 하는 사업'.
소년은 이것이 무슨 뜻인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아는 바 전혀 없었고, 단 한 가지, 1등을 뽑아 큰 돈을 몰아준다는 것이었다.
1등, 오 백 만 원!!!!
멀리서 소년이 사는 산동네 바위를 깨뜨리는 다이너마이트 폭발음이 꽈광 들려왔다.
볏짚 가마니와 돌 부스러기가 일시에 튀어올랐다가 우수수 떨어져내리는 광경이 떠올랐다.
동전을 꽉 쥔 주먹 안에선 벌써 땀이 끈적거렸다.

부채를 열심히 부치던 노인네는 가래를 카악 올려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데나 뱉었다.
소년은 노인이 싫었다.
그 노인은 모든 아이들을 거지 내지는 잠재적 도둑으로 여겨서, 부모의 동행이 없이 구멍가게에 들어오는 아이들을 보면, 끊임없는 감시의 눈빛으로 못마땅하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먼젓번에도 친구가 캬라멜을 사는 동안 소년은 구멍가게 앞에 늘어놓은 딱지니, 유리구슬이니, 팽이니... 이런 것들을 구경하다가 그 노인의 부채로 뒷통수를 한 번 맞은 적도 있었다.
"살 거 없으면, 가라!"

두고 봐라.
소년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1등이 되면......
먼저 삼 백은 아빠와 엄마 그리고 우리 가족을 위하여 집을 산다.
백은 엄마를 드려 반찬값으로 쓰시게 하여 매일매일 쌀밥을 먹을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 백은 날 위해 두었다가 산도 비스켓과 모리나가 캬라멜, 그리고 삼립 단팥빵을 매일매일 사주고 구멍가게 노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준다.
1등이 되면....

큰 숨을 들이마시고 구멍가게 쪽으로 크게 한 걸음을 옮겨놓는다.
벌써 소년의 등장을 감지한 노인은 하던 부채질을 멈추고 소년을 꼬나보기 시작한다.
소년은 애써 노인의 눈초리를 무시하는듯 땅을 보고, 하늘을 보면서 비실비실 옆걸음질로 조금씩 조금씩 가게쪽을 향하여 발걸음을 떼어놓는다.
노인은 소년이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눈길을 거두지 않고 더더욱 미간을 찌푸린다.
한 걸음, 한 걸음...... 거진 다 왔다.
커-억 하고 가래를 뱉어내는 노인.

이마에 삐직삐직 돋아난 땀을 맨팔뚝으로 쓰윽 훔치고 노인네를 바라보았다.
"저기요..."
"뭐냐?"
소년을 한 번 꼬나보고는 서너번 부채를 훽훽 부친다.
"우리 엄마가 복권 하나 사오래요."
"뭐?"
노인이 되묻는다.
"우리 엄마가 복권 하나 사오래요."
노인은 피식 웃더니 다시 부채를 서너번 훽훽 부친다.
"돈!"
"여기요..."
손이 펴지자마자 노인은 빼앗듯 소년의 손에서 냉큼 동전을 낚아채간다.

금고통을 열며 노인이 퉁명스럽게 묻는다.
"몇 조?"
"???"
아, 이거 생각지도 않은 장벽에 부딪혔다.
몇 조가 뭐람...?
"몇 조냐니까?"
"저... 아무거나요."
그렇지, 아무거나 달라하면 되지...
자기 스스로 대답을 멋지게 해냈다는 생각에 소년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돌았다.

주머니에 복권을 쑤셔넣은 소년은 뒤도 안돌아보고 재빨리 집 쪽 방향으로 달음질 했다.
꽈-광
다시 다이너마이트가 터지고, 곧 이어 바위 부스러기가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발소 표시등이 흔들 하더니, 불빛이 몇 번 깜빡거렸다.
그래도 아랑곳 하지 않고 달리는 소년의 모습은 가볍고 힘이 넘쳤다.
내 주머니에 일등 복권이 있다!
복권만 되면, 복권만 되면......

"여기 놔두었던 백 원짜리 못봤니?"
"아니요..."
엄마의 의심 가득한 눈초리를 피하며 소년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다.
가슴은 두근두근 심하게 방망이질 치고 있어도, 바지 주머니에 있는 희망의 소리는 그 심장박동 소리를 충분히 가리고도 남았다.
"거 참 이상하다... 콩나물 좀 사려 했더니...
"엄마, 나 나가서 놀다 올께요."
"저녁 먹기 전까진 들어와라..."
엄마의 갸우뚱한 표정을 뒤로 하고 소년은 힘차게 달려나갔다.

다음날 아침, 소년은 소스라치게 놀라 기절할 것만 같았다.
밤 사이 벗어놓은 바지가... 바지가 없어진 것이었다.
그는 다급한 나머지 팬티 바람에 밖으로 뛰어나가며 바지를 찾았다.
바지가, 바지가......
복권이, 복권이......
그리고 그는 큰 빨래용 고무대야 속 비눗물에 묻혀있는 자신의 바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엄마... 내 바지....?"
"어제 땀을 너무 많이 흘린 것 같아 빨고 있단다. 다른 바지 찾아 입으련?"
엄마는 고무대야에 들어가 비눗물 속에 남긴 빨래들을 자근자근 밟으신다.
자근 자근 자근...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내가 부르다 죽을 이름이여!
아이구, 두야!





(2009.04.12)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