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오십부터래...

인생은 오십부터래... ^^

2011년 7월 15일 금요일

외할머니


외할머니








아침에 서울로부터의 눈소식을 받았다.
여러가지 춥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마음을 포근하게 하여 빙그레 웃음을 머금게 하는 눈.
여의도에 흩날리는 그 눈 사진을 보다가 문득 한가지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70년대 초쯤 일까? 
종로5가통에서 지금의 대학로 방향으로 예전에 수유리, 의정부 방면으로 운행하는 마이크로버스들이 집결하는 주차장이 있었다.
15인승 정도의좀 큰 봉고를지칭하는 말이었는데이걸 타고 한참을 가면 수유리가 홱하고 지나가고 북한산,도봉산을 왼쪽 차창으로구경하다가 오른쪽으로 수려한 산세의 수락산이 나타나면 어느새 이 조그만 차는 지금의 망월사역 앞 의정부 101보충대 앞에 이르게 된다.
101보 앞에서 차를 내려서 먼지 폴폴 날리며 출발하는 마이크로버스를 뒤로 하고수락산 방향으로 슬슬 걸어가면 곧 길을90도로 자르고 있는 폭 넓은 중랑천을 만나게 된다.

지금이야 콘크리트 다리가 놓여있지만그 때는 중랑천을 가로지르는 수중보 위를 걸어다녔는데, 그게폭이 약 1미터 정도도 안되어서이쪽으로 오는 사람과 중가운데서 마주치면 서로 옆으로 돌아서서 비켜줘야 했고 굼실거리는 물살 때문에 보통때도 항상 현기증을 유발시켰다.
게다가 여름엔물이라도 불어나면, 보통은 종아리 정도 잠긴 채 물 속에 있는 수중보를 보면서 발을 디뎌야 하기 때문에 상당히 위험하기도 했다.
실제로 밤에 건너다가 떨어져 물에 떠내려갔던 사람도 있었고 했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은 꼭 어른 손을 잡고 건너야 했던 어드벤처 코스였다.

하지만 긴장감에 등에 진땀이 제법 날 무렵이 되면 어느새 나의 작은 발은 맨 땅을 디딛고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거기서부터가 바로 우리 외할머니댁이 있는 장수원(長水院).
수락산에서 길게 흘러 내려온 물이 중랑천과 합해지는 곳이라는 뜻에서 연유한 마을 이름이다.

여름엔 초록이 울창하게 우거져서 길 잘못들면 길을 잃고 산을 뱅뱅 돌다가 굶어죽는다는 이야기도 있고, 계곡에 흐르는 물은 깨끗하고 차가워서 여름만 되면 세상 온갖 돛자리들이 물가에 깔리는 곳으로, 곳곳의 물웅덩이에서 수영도 하고 발 담그고 참외랑 수박이랑 배 터지도록 먹던추억이 남아있다.
겨울엔 어찌나 춥고 눈도 많이 왔던지 예의 계곡으로 썰매를 타러가지 않으면 방안 구들장 짊어지고 두툼한 솜이불 껴덮고 있어도 따듯한 줄 모르던,하지만 집집마다 뜨거운 찌게도 담 너머로 서로서로 건네던 작고 아름다운 인심의 마을이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좋았던 것은 바로 우리 외할머니가 그곳에 계시다는 점이었다.
투박한 이북 말씨에 적당한 욕을 섞어 쓰시던 외할머니는, 겉으론무뚝뚝남성적이셨지만 속으론 항상비단결이셨다.
"이 간나인 누굴 닮아 이리도 잘 생겼네?"
사랑하는 외손주에게 사랑으로 툭 던지던 말씀이었지만 내겐 그 억양이 무척이나 겁이 났다.
내가 무얼 잘못한게 아닌지? --;
"간나이 서울에서 잘 먹다가 여기 오니 먹을 것도 없지?"
하시면서 꼬옥 끌어 안을라치시면 난 무서워 사시나무 떨듯 하곤 했다.
참 몰라도 한참 몰라서 지금도 외할머니께 미안한 생각이 들 뿐이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그 겨울날 아침도 외할머니께서는 서울에서 온 외손주를 위해 부엌에 계셨었다.
우리는 전날 썰매에 새로아이스스케이트날을 덧대어 엄청나게 빨라진 스피드 덕분에 하루종일 추운 줄 모르고 해 떨어지도록 썰매를탄 후따뜻한 물로 목욕까지 했기에 그 노곤함에 저녁도 잊고 곯아떨어졌던 우리에게 좋은 아침을 주셔려던 참이셨다.
삼 사일 전에잡아두었던 산토끼를 손주들 온다고 챙겨놓으셨다가맛있는 토끼탕을 뜨끈하게 끓여주시려는 거였다.

"야들아, 상 들어가니끼니 방 좀 치우라!"
그 때만 해도 식당 개념이 전혀 없는 시골 단독주택이라서 부엌에서부터방으로 상을 들어 옮기고 아랫목 주위에 빙 둘러앉아 먹던 시절이었다.
마루에서 방으로 들어오는 미닫이 문이 드르륵열리더니 외할머니께서 빨개진 얼굴로상을 들고 문지방을 막 넘어오시면서, 작은 외사촌형에게,
"이 간나이 좀 저리 비키지 못하간?"
하시더니 중심을 잃으시면서 옆으로 기우뚱 무너지시는 것이었다.
"할머니!!!"

중풍으로 쓰러지신 외할머니께 우리는 너나 할것없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빨리 비키지 않은 작은 외사촌형도, 상을 자신이 받아들지 않아서 그랬다는 큰 외사촌형도, 괜히 추운 겨울날 놀러가서 할머니를 무리한 상황으로 내몬 우리도......
움직이지 못하시는 외할머니의 희미한미소가 더 가슴아프게 했다.
말씀은 못하셔도 분명 나는 괜찮다는 표정이라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안다, 내 다 안다."

하얀 눈이 내리면서떠오른 그 날.
그리고 외할머니.
불현듯 그 투박했던 웃음이 그립다.


외할머니댁 

1. 새벽같이 쇠죽쑤는 할아버지 곁에서
졸리운 눈 비비며 콩을 골라먹었지
모깃불놓은 마당에 멍석깔고 누워서
밤하늘에 수놓은 별보석 따 담으며
아기울음 흉내내는 승냥이 얘길 들었지

사방으로 병풍같은 산들이 둘러있고
온 마을에 싱그런 바람냄새 가득하던
어린 시절 꿈을 줍던 정다운 시골마을
아아-아 다시 가고픈 그리운 할머니댁


2. 겨울아침 샘물에서 실안개 피어나면
물동이인 아낙네들 샘터로 모였지
달님도 뒷동산에 숨어드는 밤이면
화롯가에 둘러앉아 고구마 묻어놓고
할머니의 구수한 옛날 얘기를 들었지

사방으로 병풍같은 산들이 둘러있고
온 마을에 싱그런 바람냄새 가득하던
어린 시절 꿈을 줍던 정다운 시골마을
아아-아 다시 가고픈 그리운 할머니댁 


(논두렁 밭두렁 곡) 




(2008.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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