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리께로 태양이 뜨거워질 무렵
외로운 길을 따라 주욱 늘어선,
한 무리의 증기기관차들을 만났다.
명색이 '증기기관차 박물관' 이라지만
그저 뻐얼건 피들만 곳곳에 흥건한 이곳은,
차라리 '증기기관차 자연사(自然死) 박물관' 이라고 하자.

더 이상 저 앞산을 치고 오르질 못해
이곳에 생의 여정을 접었는가.
분한 마음을 어찌하지 못해 두 눈 부릅떠
그 준령 바라보며 원귀가 되었는가.
아무 눈에 띄이지 않는 이 골짜기에
수치스럽게 뼈를 묻고 서있다.
"여보게,
그저 아무에게도 내 여기 있다는 이야긴 말아주게.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세월의 결박으로
깊은 산속 한구석에 쓰러져 있다는 말,
절대 절대 이야기해서는 안되네.

산과 들을 밀어내고 꽤액- 하고 기적소리 멀리 메아리치던,
그 영광의 시절, 그 위대한 대철도시대의
추억을 생각하며 조용히 있음세.
호랑이나 코끼리도 죽을 때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간다고 하지 않던가.
그저 아무도 모르게 해주시게나."
아득한 벽처럼 서있는 험산준령을 노기찬 눈으로 응시한다.
그의 커다란 탱크에 당장이라도 핏줄이 돋고 피가 돌 것 같은 모습이다.

끝없이 펼쳐진 설원을 달려가는 닥터 지바고의 시베리아횡단열차.
엄마를 위해 우주를 가로지르는 철이를 태운 은하철도 999.
알 수 없는 마법의 세계로 해리 포터를 싣고 가는 호그와트특급.
13명의 사람이 폐쇄공간에서 벌이는 살인사건 퍼즐, 오리엔탈 익스프레스.
그리고 아이들을 싣고 북극으로 질주하는 폴라 익스프레스.
"기차가 어디로 가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그 기차에 올라타겠다고 결심하는거지."

The Baldwin Locomotive Works, 1928년 4월 제작.
가슴 한켠으로 붙어있는 이름표가 그의 태생을 이야기한다.
그가 태어날 때만 해도,
나는 새보다도 빠르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그가 달릴 때만 해도,
수백 마리의 황소보다 힘이 세다고 했다.
자랑스움에 기적을 길게 길게 울리며 산구비를 돌았다.

새벽 어둠 속에
급수조에서 물을 가득 채운 증기기관차는
플랫폼 하나 가득 수증기를 내뿜으며
하나씩 둘씩 발맞추어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한다.
치익- 치익- 포옥- 포옥-
출발을 알리는 기적이 두 번 꽤액- 꽥- 하고 울리면
철마의 고동소리는 점차 스타카토로 빨라지기 시작한다.
칙, 칙, 폭, 폭....
칙칙폭폭.

깊게 회상에 빠진 그의 눈시울에 반짝,
이슬이 맺힌다.
하지만 너무 슬퍼하지는 마시길...
자신의 갈 길을 다 간 그대에게 남겨진건 따뜻한 격려 뿐.
이제 그 분을 고이 삭히시구랴.
A Job Well Done!, my friend.
그 말 한 마디 뿐.
돌아서는 등 뒤로 꽤액- 하고 긴 기적이 터져나온다.

(2009.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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